‹ 목록으로 겨울 마녀, 파멸의 서약

1화

결재판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쿵. 소리부터 심상치 않았다. 책상 위 커피잔이 흔들렸다. 나는 손을 뻗어 잔을 붙잡았다. 다행히 넘치지는 않았다. "부지부장님. 지부장님이 직접 내려온 건입니다." 미나가 서류를 밀어 넣으며 눈을 피했다. 평소라면 실없는 농담 한마디쯤 붙였을 그녀다. 오늘은 아니었다. 나는 첫 장을 넘겼다. [구출 임무 — 은월촌 실종자 수색 및 회수] 등급, 위험도, 지원 인력. 숫자들이 눈에 들어왔다가 곧 흩어졌다. 글자들이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위험도가 왜 공란이에요." "모른대요. 몰라서 공란입니다." 미나가 짧게 대답했다.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가 낮았다. "모르는데 나한테 지휘를 맡긴다고요?" "그러니까 부지부장님한테 맡기는 거죠. 아시잖아요, 이럴 때 부를 사람이 몇 없다는 거." 안다. 알아서 더 짜증이 났다. 안전한 자리를 오 년 동안 지켜온 이유가 바로 이거였는데. "몇 없다는 게 저 하나라는 뜻이죠, 결국." "그렇게 말씀하시면 좀 슬프잖아요." "슬픈 건 나예요." 미나가 피식 웃었다. 억지웃음이었다. 나도 안다, 저 웃음이 억지라는 걸. 서류를 든 손끝이 조금 서늘했다. 사무실 난방이 잘 되는데도 그랬다. 전생에서 나는 회사원이었다. 야근과 상사와 대출이자로 이뤄진 삶이었다. 퇴근길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을 씹으며 버스를 기다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삶이 끝나던 순간을 기억한다. 트럭 헤드라이트, 그리고 다음 눈을 떴을 때는 이 세계였다. 『월의 성녀는 그대와 춤춘다』. 내가 삼백 시간쯤 갈아 넣었던 게임의 세계. 스틸컷 하나하나가, 대사 하나하나가 아직도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그게 저주가 될 줄은 몰랐지만. 나는 주인공도, 조연도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는 마을 사람 1이었다. 이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정도의 모브. 게임 내에서 대사 한 줄 없었을 존재. 그런 존재가 이렇게 눈을 뜨고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엔 흥분했다. 알고 있으니까. 어느 던전에 뭐가 나오는지, 어느 사냥터에서 뭘 조심해야 하는지, 심지어 히로인들의 성격까지도. 그래서 검을 들었다. 모험가가 됐다. 검을 처음 쥐었을 때의 감각이 지금도 손바닥에 남아 있다. 무겁고, 어색하고, 그런데도 설렜다. 그리고 이 년 만에 그만뒀다. 게임 지식이라는 게 생각보다 쓸모없었다. 몬스터 위치는 알아도 그 몬스터가 내 검을 씹어먹는 건 그대로였고, 던전 구조는 외워도 함정에 걸려 다리가 부러지는 건 똑같았다. 칼날이 스치던 소리, 살을 파고들던 감각. 그런 건 게임 화면 너머로는 절대 전해지지 않는 정보였다. 동료 하나가 죽었을 때, 나는 알았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웃던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날로 사무실 책상을 골랐다. 안전하고, 지루하고, 확실한 자리. 회의 자료를 정리하고, 결재판에 도장을 찍는 삶. 그게 훨씬 나았다. "은월촌이라." 서류를 다시 읽었다. 마을 이름이 낯익었다. 낯익다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서류 위의 글자가 마치 다른 언어처럼 보였다가, 곧 익숙한 형태로 되돌아왔다. 게임에서, 은월촌은 딱 한 번 언급됐다. 메인 스토리 후반, 성녀 루트의 결정적 분기점. 플레이할 때는 그냥 지나가는 장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전개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마을의 정식 명칭은 다른 이름이었다. 달의 무덤.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입안이 말랐다. "부지부장님?" 미나가 내 표정을 살폈다. "왜 그러세요, 갑자기 낯빛이." "아니에요." 나는 서류를 덮었다. 덮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일단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다. 미나가 뭔가 더 묻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부장님 뵈러 가야겠네요." "파이팅이요." 파이팅이라니. 이럴 때 하는 말치고는 너무 가벼웠다. 지부장실 문이 열리기까지, 나는 세 번 숨을 골랐다. 한 번, 마음을 다잡으려고. 두 번, 거절할 말을 고르려고. 세 번, 그게 소용없다는 걸 인정하려고. 문고리를 잡은 손이 차가웠다. 내 손이 이렇게 차가웠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한지훈 부지부장. 자네가 가야 해." 지부장 오현석은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인사도 없었다. 늘 그런 사람이지만, 오늘은 유독 더 급했다. "제가 왜요. 필드는 그만둔 지 오 년입니다." "자네만큼 그 지역 실종 사건을 아는 사람이 없어." "모르는데요, 저도." 거짓말이었다. 게임을 알았다. 현실을 몰랐다. 그 둘이 얼마나 다른지는, 오 년 전에 뼈저리게 배웠다. "모르니까 가서 알아 와." 오현석의 목소리에는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본부에서 직접 내려온 지시야. 자네가 지휘하고, 필드팀은 붙여줄 테니." 책상 위에 놓인 펜이 눈에 들어왔다. 저걸 던지면 좀 후련할까,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필드팀 누굽니까." "박승우, 최유진, 그리고 몇 명 더."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오 년 전, 내가 마지막으로 함께 던전을 밟았던 얼굴들. 속이 뒤틀렸다. 그리움인지 두려움인지 구분이 안 됐다. 박승우의 껄껄대는 웃음소리, 최유진이 화살을 날릴 때 눈매가 날카로워지던 모습. 그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둘 다 여전히 현역입니까." "현역이지. 자네만 도망갔지." "도망이 아니라 전략적 후퇴였습니다." "오 년짜리 후퇴는 이제 그만 끝내야지." 오현석이 피식 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실종자는 몇 명입니까." "열둘. 그중 하나는 아이다." "아이요?" "열 살쯤 된 여자아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걸로 추정돼." 오현석이 지도를 펼쳤다. 지도 위, 은월촌이라는 작은 점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주변 마을 증언에 따르면, 은월촌은 지금 완전히 침묵 상태야. 통신도, 정찰조도 안 돌아왔어." "정찰조라뇨. 몇 명이나 보냈습니까." "셋. 사흘 전에." "그리고 아무 소식도 없다는 거군요." "그래." 숨소리가 잠깐 멎었다. 아무 소식도 없다는 건, 셋 다 살아 있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나는 지도를 내려다봤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게임 속 달의 무덤.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존재. 설정상 그건 단 하나였다. 성녀. 아니, 성녀가 되기 전의, 저주받은 소녀. 게임 스토리대로라면, 그 소녀는 마을 전체가 저주에 잠식되는 걸 홀로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그 저주의 원인은— "언제 출발입니까." 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오현석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일 아침. 다들 기다리고 있어." "장비는요." "필요한 건 다 챙겨놨어. 자네 몫도 별도로." "제 몫이라니, 갑옷 사이즈까지 기억하고 계셨나 봅니다." "오 년 전 것 그대로 있더라고. 안 버렸으니까." "버렸어야 했는데." 오현석이 대답 없이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을 나오면서 나는 알았다. 이건 그냥 구출 임무가 아니다. 게임에서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말에서, 마을 사람 1은 살아남지 못했다. 복도를 걸으며 나는 몇 번이나 그 사실을 되새겼다. 마을 사람 1. 이름조차 화면에 뜨지 않는 존재. 그게 나였다. 그런데 이번엔 지휘관으로 그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미나가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내일 아침 출발." "제가 뭐 도울 거 있어요?" "있죠." 나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웃음이 잘 지어지지 않았다. "내가 안 돌아오면 제 자리 좀 맡아주세요." 미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농담이에요." 농담이 아니었다. 미나가 한참을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꼭 돌아오세요. 진짜로요." "노력해볼게요." 그 말도 진심이었다. 하지만 노력만으로 될 일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은월촌 방향이었다. 붉은빛이 창문을 타고 사무실 바닥까지 길게 뻗었다. 그 빛이 마치 손가락처럼, 나를 그 마을 쪽으로 잡아끄는 것 같았다. 나는 서류를 다시 펼쳤다. 실종자 명단, 열두 개의 이름. 그 아래, 별도로 표기된 아이의 이름은 없었다. 그냥 '여아, 나이 미상'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름조차 없는 아이. 어쩐지 낯설지 않은 처지였다. 내일이면, 나는 게임 속에서 가장 위험했던 무대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엔, 이야기의 결말을 뒤바꿀 존재가 홀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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