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사랑 금지 협정이라니

5화

나는, 계절이 두 번쯤 바뀌는 동안, 여름과 나 사이에는 이상한 리듬이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그 애가 나를 [저기요]라고 불렀다. 그 호칭이 낯설어서, 나는 매번 대답하기 전에 반박자씩 늦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빠]로 바뀌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옛날처럼 [도현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느 날 소프트볼부 훈련장 앞에서 그 애가 무심코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 짧은 세 글자가 왜 그렇게까지 나를 흔들어놓는지, 나조차 설명할 수가 없었다.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었다. 여름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보낸 구체적인 사건들을 하나도 떠올리지 못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넘어져 울던 일도, 중학교 졸업식에서 셋이 나란히 사진을 찍던 일도, 그 애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앞에서만 편안해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여전히 어딘가 긴장한 낯빛을 하고 있다가, 나만 오면 어깨의 힘이 스르르 풀리는 걸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가끔은 이유 없이 손을 뻗어 내 소매를 붙잡기도 했는데, 그럴 때 그 애의 손끝은 늘 조금 차가웠고, 나는 그 온도차를 느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협정이라는 단어를 억지로 떠올리며 손을 슬쩍 빼내야 했는데, 그게 매번 점점 더 어려워졌다. 어리석었다. 손을 빼내면서도 마음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으니까. 표면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아침엔 여름의 훈련을 지켜보고, 점심엔 학생회실에서 겨울과 서류를 정리하고, 방과 후엔 가을과 매점 뒤 계단에서 삼각김밥을 나눠 먹었다. 하루의 궤적은 예전과 똑같았다. 다만 그 균형 안에, 예전에는 없던 미묘한 긴장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건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은 것이었는데,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어 보이지만 손끝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곧 끊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겨울은 서류를 넘기다가 문득 "여름이는 좀 어때" 하고 물었다. 그 질문 뒤에 숨은 것이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겨울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차분했지만, 서류를 넘기는 손끝이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나는 그 미세한 지연을 놓치지 않았다. 가을은 삼각김밥을 건넬 때마다 예전보다 한 박자 늦게 손을 뻗었고, 그 애의 시선이 내 얼굴에 오래 머무는 순간이 늘어갔다. 마치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사람처럼. 나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 삼각김밥의 포장을 벗기는 데만 집중했다. 초겨울로 접어드는 어느 날, 학교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복도마다 현수막이 걸리고, 스피커에서는 축제 홍보 방송이 흘러나왔다. 여름의 소프트볼부는 시범 경기를 열기로 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준비를 돕게 되었다. 장비를 나르고 그물을 치고 라인을 긋는 일들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조금 가라앉혀주었다. 그날 오후, 창고에서 장비를 옮기다가 여름과 단둘이 남게 됐다. 창고 안은 먼지와 오래된 가죽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 애가 갑자기 배트를 내려놓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아무런 계산도 없어 보였다. 그저 순수한 궁금증뿐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도현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우리… 예전엔 어떤 사이였어?" 그 물음이 창고 안의 먼지 냄새 사이로 조용히 떨어졌다. 나는 숨을 한 번 삼켰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운동장에서, 골목에서, 옥상에서 나눴던 수많은 순간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가, 다시 흩어졌다. 나는 대답을 고르다가, 결국 "그냥, 좋은 친구였어"라고 짧게 답했다. 어리석었다, 십 년을 함께한 관계를 그렇게 세 마디로 뭉개버린 게. 그 말을 내뱉는 순간에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지만, 진실도 아니라는 걸. 여름은 그 대답에 살짝 웃었지만, 어딘가 서운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웃음의 끝이 조금 흔들렸다. 나는 그 표정을 애써 못 본 척했다. 배트를 다시 집어 드는 그 애의 뒷모습을, 나는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저녁, 매점 뒤 계단에서 가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굳은 얼굴이었다. 계단 난간에 기대선 채로, 두 팔을 가슴 앞에 단단히 교차하고 있었는데, 그 자세만으로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창고에서 무슨 얘기 했어." 다짜고짜 물었다. "그냥, 옛날 얘기." "거짓말하지 마." 가을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나 다 봤어. 창문으로. 너 걔한테 좋은 친구였다고 했잖아. 근데 표정은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목 안쪽이 순간적으로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가을의 눈에 서린 것이 화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 눌러 참아온 무언가라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그건 마치 오랫동안 눌러왔던 둑이 조금씩 갈라지는 소리 같았다. "나 이제 더 못 참겠어, 도현아." 가을이 손톱을 물들인 손끝으로 계단 난간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너랑 여름이 사이에 뭔가 자꾸 생기는 거, 나 협정 지키자고 계속 눌러왔는데, 이제 한계야." 그 말을 남기고 가을은 뒤도 안 돌아보고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협정이라는 단어가 이제 얼마나 무의미해졌는지를 느꼈다. 처음 그 협정을 맺었을 때는, 이 균형이 영원히 유지될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건 애초에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던 걸까. 그리고 며칠 뒤, 학생회실에서 서류 정리를 마친 늦은 오후, 겨울이 평소와 다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창밖을 잠시 바라보던 그 애의 옆모습이 유난히 하얗게 빛나 보였다. "도현아, 잠깐 옥상에서 얘기 좀 하자." 리본을 고쳐 매는 그 애의 손끝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의 의미를 아직 알지 못한 채로,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심장이 조금씩 더 무겁게 뛰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