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나는,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우리의 하루가 이토록 정교하게 짜인 균형 위에 서 있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셋을 오가는 이 생활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는지, 그 균형이 실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세 사람이 나를 위해 참아준 결과였다는 걸, 그때는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 얘기고, 그날의 아침으로 돌아가면,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익숙한 순서대로 하루를 채워가고 있었다.
아침 자습 시간, 나는 도서관 대신 운동장 트랙 옆에 서서 소프트볼부 훈련을 지켜보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건 벌써 몇 년째 굳어진 습관이라, 담당 선생님도 나를 보면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갔다. 여름은 4번 타자였고, 배팅 케이지 안에서 방망이를 휘두를 때마다 어깨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공이 방망이 중심에 맞아 나갈 때 나는 둔탁한 소리는, 이상하게도 아침마다 나를 잠에서 완전히 깨워주는 것 같았다.
"도현아! 오늘 8시부터 시합 있는데 보러 올 거지?"
그 녀석이 헬멧을 벗고 손을 흔들며 소리쳤을 때, 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이미 스케줄 표에 그 시간을 비워두고 있었다는 걸, 여름은 몰랐다. 이 정도의 거짓 시치미는, 나에게는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다.
"당연하지. 근데 너 어제도 늦게까지 배팅 연습했다며. 코치가 뭐라 안 해?"
"뭐라 하긴, 오히려 더 하라고 하지." 여름이 씩 웃으며 방망이를 어깨에 걸쳤다. "너 오면 이상하게 스윙이 더 잘 맞아. 부적이야, 부적."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게 여름다웠다. 나는 대답 대신 픽 웃었고, 그 웃음이 그 애에게 어떤 의미로 읽혔을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협정은 사소한 일상에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여름과 아침마다 십 분씩 훈련장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시간이 되면 학생회실로 자리를 옮겨 겨울과 서류를 정리했다. 두 사람이 겹치는 시간은 절대 만들지 않는다는 게, 내가 세운 규칙 중에서도 가장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항목이었다.
겨울은 볼펜을 정확히 두 번 돌린 뒤에야 입을 여는 버릇이 있었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부터 그 애가 볼펜을 돌리는 소리를 들었다. 딸깍, 딸깍. 정확히 두 번.
"이번 축제 예산안, 다시 검토해야 할 것 같아."
그 애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서늘하고 단정했지만, 서류 위로 스치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걸 나는 눈치챘다. 아마 요즘 학생회 안에서 뭔가 시끄러운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캐묻지 않고 겨울이 내미는 서류 뭉치를 받아 들었다.
"뭐가 문제인데."
"부장이 예산을 자기 마음대로 배정했어. 동아리 지원비를 절반이나 깎아놓고."
겨울의 말투는 화가 나 있다기보다는, 그저 사실을 나열하는 것처럼 건조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애가 화가 났을 때는 목소리가 오히려 더 차갑고 정확해진다는 걸. 나는 서류를 넘기며 슬쩍 그 애의 옆얼굴을 봤다. 눈매가 우묵하게 그늘져 있었고, 입술은 얇게 다물려 있었다.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 무표정 안에 뭔가가 응축되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내가 부장한테 말해볼까?"
"됐어." 겨울이 곧바로 잘랐다. "네가 나설 일 아니야."
그 단호함에,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겨울과 있을 때는 늘 이런 식이었다. 다가가려 하면 정확한 선에서 밀려나고, 그 선을 넘지 않는 게 우리 사이의 또 다른 룰이었다.
방과 후에는 매점 뒤편 계단에서 가을을 만났다. 그 애는 매번 다른 색으로 물들인 손톱을 까딱거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오늘은 초록빛이었다.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왔다.
"늦었잖아." 가을이 눈을 흘기며 삼각김밥을 던지듯 건넸다.
"5분 늦은 거 가지고."
"5분이 어디야. 나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
겉으로는 늘 시비 거는 투였지만, 삼각김밥은 항상 내가 좋아하는 종류였다. 참치마요, 다른 맛은 절대 사 오지 않았다. 나는 그 모순을 알면서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게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오늘 겨울 만났지." 가을이 손톱을 만지며 무심하게 물었다.
"어. 왜."
"아니, 그냥. 걔 요즘 학생회 일로 스트레스 받는 거 같던데.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몰라도 돼." 가을이 삼각김밥 포장을 뜯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알아서 뭐 어쩔 건데."
그 말투에 살짝 가시가 박혀 있었지만, 나는 그냥 넘겼다. 가을은 늘 이런 식으로 힌트만 던지고 정작 중요한 건 말해주지 않았다. 그게 그 애 나름의 배려인지, 아니면 그냥 성격인지는 아직도 확실히 모르겠다.
이렇게 셋을 오가는 하루가, 벌써 몇 년째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이 균형을 지키는 게 곧 협정을 지키는 것이라 믿었고, 셋 중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으려는 그 노력이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원칙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원칙이라는 게, 실은 얼마나 억지스러운 것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오후 훈련이 끝날 무렵, 하늘이 갑자기 흐려졌다. 예보에 없던 비였다. 구름이 순식간에 몰려와 하늘 전체를 잿빛으로 덮었고, 운동장 흙바닥에서 비릿한 흙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름은 자전거를 끌고 나오며 "괜찮아, 그냥 소나기야" 하고 웃었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 웃음이 마음에 걸렸다. 왜였을까.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웃음이었는데.
"우산 없어?" 내가 물었다.
"없어도 돼. 집 가까우니까 빨리 달리면 돼."
"그러다 감기 걸려."
"나 몸 튼튼한 거 몰라?" 여름이 팔을 굽혀 알통을 보여주는 시늉을 했다. 그 유치한 몸짓에 나는 웃음이 났고, 그 웃음이 그 애를 더 신나게 만든 것 같았다.
"오늘 시합 이겼으니까, 내일은 떡볶이 먹으러 가자." 여름이 헬멧을 흔들며 나에게 손가락을 걸어왔고, 나는 별생각 없이 그 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손끝이 땀에 살짝 젖어 있었는데, 그 순간의 온기가 유난히 따뜻했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뒤늦게 곱씹게 됐다.
"약속." 여름이 씩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약속."
교문 앞에서 헤어질 때, 겨울과 가을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고, 여름은 자전거를 타고 큰길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늘 그렇듯 마지막으로 여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는데, 그날은 유난히 그 애의 자전거 바퀴가 젖은 도로 위에서 미끄러질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려 보였다. 페달을 밟는 다리에도 힘이 없어 보였고, 자전거가 커브를 도는 순간에는 몸이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다가 다시 균형을 잡는 게, 평소의 여름답지 않게 위태로워 보였다.
그저 기분일 뿐이라고 애써 넘겼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해서, 나도 서둘러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해 씻고 나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강여름]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고,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전화를 받았다.
"어, 왜, 벌써 떡볶이 얘기하려고?"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낯선 정적이, 평소와는 다른 무게로 귓속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