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에 아름의 심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담임선생님이 무언가를 가지러 온 듯, 교탁 서랍을 뒤적이며 교실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그 시선이 창가 쪽 두 사람의 자리를 스치듯 지나갈 때마다 아름은 숨을 아예 참아버렸다. 책상 아래로 맞잡고 있던 소라의 손에서도 미세한 떨림이 전해져왔고, 그 떨림이 아름의 손끝까지 그대로 옮아왔다.
'제발, 제발 그냥 나가주세요.'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선생님의 구두 소리가 교실 바닥을 또각또각 울릴 때마다 아름은 그 소리의 방향을 귀로 좇으며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고, 다행히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한 듯한 선생님은 서랍에서 원하던 서류를 찾아낸 뒤 별말 없이 다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져 마침내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아름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진짜 심장 떨어질 뻔했어." 아름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낮게 중얼거렸는데, 여전히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는 게 손끝의 미세한 진동으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소라는 그런 아름을 보며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도감과 짜릿함이 뒤섞인, 어딘가 짓궂은 웃음이었다.
"그래도 안 들켰잖아." 소라가 여전히 맞잡고 있던 손을 슬쩍 들어 손가락을 하나하나 얽으며 말했는데, 그 웃음이 안도와 아쉬움이 동시에 묻어난 묘한 표정으로 번져갔다.
"안 들켰으니까 다행이지, 만약 들켰으면 어쩔 뻔했어." 아름이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꾸했지만, 소라는 대답 대신 얽은 손가락에 힘을 살짝 주며 웃기만 했다.
수업이 끝나고 하교하는 길에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면서도 손을 잡지 못했고, 아름은 그 짧은 거리감이 못내 아쉬웠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
토요일 오후, 아름의 집.
소라가 갑작스레 놀러 오겠다고 연락을 해왔을 때, 아름은 침대에 누워 늘어져 있다가 휴대폰 진동에 몸을 일으켰다.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보는 순간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러라고 답을 보냈다.
[지금 나가도 돼?]
[응, 와도 돼.]
짧은 대화였지만, 답장을 보내고 나서 아름은 왜인지 방 안을 두어 번 둘러보며 어질러진 것들을 대충 정리했다.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닌데 괜히 신경이 쓰이는 게,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초인종이 울리고 문을 열자, 소라는 양손에 과자 봉지를 가득 든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편한 후드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교복을 입었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가 묘하게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어머, 소라야! 이게 얼마 만이니." 아름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앞치마 차림으로 나오며 반갑게 소라를 맞이했는데, 어릴 적부터 자주 놀러 오던 소라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눈치였다.
"어머니, 저 왔어요! 잘 지내셨죠?" 소라가 넉살 좋게 인사를 하며 신발을 벗었고,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소라의 손에 들린 과자 봉지를 받아 들었다.
"뭘 이런 걸 사 왔어, 그냥 몸만 오면 되는데." 어머니가 웃으며 봉지를 살펴보는 사이, 소라는 익숙한 걸음으로 집 안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여기 그대로네요. 저 어릴 때 놀러 왔을 때랑 똑같아요." 소라의 말에 어머니가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며 대답했다.
"우리 집이야 뭐, 늘 그대로지. 얼른 방에 들어가서 놀아, 간식 준비해줄게."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소라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에 벌러덩 누우며 아름을 끌어당겼다.
"야,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아름이 놀라 몸을 빼려 했지만, 소라는 팔에 힘을 주며 아름을 품 안에 가두었고, 그 힘이 생각보다 세서 아름은 저항을 포기한 채 소라의 품 안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이렇게 있고 싶어서." 소라가 아름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는데, 그 목소리에 담긴 나른한 온기가 아름의 마음을 이상하게 흔들어놓았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두 사람의 몸 위로 옅게 드리워져 있었고, 방 안 가득 퍼진 그 부드러운 빛 속에서 소라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은근한 샴푸 향이 코끝을 스치자, 아름은 문득 어린 시절 함께 낮잠을 자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소라는 이렇게 사람을 끌어안는 걸 좋아했었고, 아름이 답답하다고 밀어내면 오히려 더 세게 끌어안으며 장난스레 웃던 얼굴이 생생했다. 아름은 그게 귀찮으면서도 은근히 좋았던 것을, 이제야 다시 깨닫는 기분이었다.
"너 옛날부터 이랬어. 사람 끌어안는 거 되게 좋아했잖아." 아름이 소라의 팔을 톡톡 두드리며 말하자, 소라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기억하네. 그때도 너 싫다고 하면서 결국 가만히 있었잖아."
"그건... 네가 힘이 세서 그런 거지." 아름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변명하듯 대답했는데, 소라는 그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부엌에서 어머니가 그릇을 정리하는 소리만이 방 안의 정적을 채웠다.
"아름아." 소라가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응." 아름이 대답하자, 소라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침묵했다가, 아름의 등을 감싸고 있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중에, 우리 이거 계속하면… 진짜 사귀는 거 맞지?" 소라의 질문이 뜻밖에도 조심스러웠는데, 평소의 자신감 넘치던 모습과는 다른, 불안이 살짝 묻어난 목소리였다.
아름은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소라의 심장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려왔고, 그 박동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아직 확신이 없는데.'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소라의 팔이 아름의 등을 조심스레 감싸는 감촉에, 아름은 조금씩 마음이 기울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소라의 체온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고, 그 따뜻함이 아름의 망설임을 조금씩 녹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잘 모르겠어. 근데." 아름이 말을 흐리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근데 뭐." 소라가 아름의 말을 재촉하듯 되물었는데, 그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근데 이렇게 있는 거 싫지 않아.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 아름의 대답이 미묘하게 답을 피해가는 것 같았지만, 소라는 그 말에 잠시 아름을 바라보다가 다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그럼 됐어." 소라가 짧게 대답했는데, 그 목소리에 안도와 아쉬움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그 순간 방문 밖에서 아름의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간식 좀 먹어야지! 소라가 사 온 과자에 과일도 좀 깎았어." 어머니의 부름에 두 사람은 화들짝 떨어져 자세를 고쳐 앉았고, 소라는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그대로 웃음을 터뜨렸지만, 아름은 방금 나눈 대화의 여운이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음을 느꼈다.
방문을 열고 나가는 소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름은 손끝에 아직도 남아 있는 온기를 가만히 쥐어보았다. 대답을 피했다는 걸 소라도 알고 있을 텐데, 그 사실이 왠지 마음에 걸려 아름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