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소라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지는 순간, 아름은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있었고, 다음 순간 부드러운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가 이내 떨어졌다.
짧은 접촉이었지만, 그 여파는 순식간에 아름의 온몸을 관통하는 듯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계단 창문으로 들어오던 저녁 바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서늘한 공기마저도 아름에게는 뜨겁게 느껴졌다.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름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려 했지만, 머릿속은 이미 하얗게 비어버린 뒤였다.
입술에 남은 감촉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맴도는 것 같아서, 아름은 저도 모르게 입가를 손등으로 가볍게 문질렀는데, 그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소라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소라는 그런 아름을 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는데, 그 웃음이 언제나처럼 해맑아 보여서, 아름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거, 만화에서 본 장면 그대로 해본 건데." 소라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뱉은 말에, 아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뭐?" 아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소라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덧붙였다. "장면은 만화에서 따온 거지만, 마음은 진짜야. 진짜로 좋아해, 아름아." 소라의 목소리가 마지막 문장에서 살짝 흔들렸는데, 그 미묘한 떨림이 아름의 귀에 오래도록 남았다.
계단 창문 밖으로 해가 완전히 저물어가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정적만이 흘렀다.
멀리서 하교하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계단 안은 그와는 다른 시간이 흐르는 듯 조용했고, 아름은 그 정적이 오히려 더 숨 막히게 느껴졌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아름이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가 진심인지, 아니면 그냥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 건지." 솔직한 말이었지만, 뱉고 나니 스스로도 마음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소라는 잠시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가,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아름의 손을 슬쩍 잡았다.
"그럼 확인시켜줄게. 천천히." 소라가 손가락을 얽으며 말했고, 그 손의 온도가 유난히 뜨겁게 느껴져서, 아름은 손을 빼내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그 온기가 마치 소라의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아름은 잡힌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소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그 눈빛이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움과는 다르게 진지해 보였다.
"진짜로… 후회 안 해?" 아름이 낮게 물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지." 소라가 단호하게 답하며 잡은 손에 힘을 살짝 더했고, 아름은 그 압력에서 어떤 확신 같은 것을 느끼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은밀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시작되었다.
***
다음 날 오전 7시 40분, 등굣길.
소라는 골목 어귀에서 아름을 기다리고 있다가 다짜고짜 팔을 걸어왔는데, 그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아름은 매번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아름이 팔을 슬쩍 빼내려 했지만, 소라는 오히려 더 세게 팔짱을 끼며 웃었다.
"이 시간엔 아무도 없어. 봐봐." 소라가 텅 빈 골목을 가리키며 자신 있게 말했고, 실제로 그 시간의 골목에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아름의 심장은 그 사실과 별개로 계속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절대 티 내지 말자." 아름이 낮은 목소리로 못을 박듯 말하자, 소라는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근데 진짜 아무도 모르게 하는 거 은근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비밀 연애, 그거 완전 만화 클리셰잖아." 소라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데, 아름은 그 말에서 또다시 불안한 기색을 느꼈다.
'클리셰라니. 저 애한테 나는 그냥 이야기 속 등장인물인 걸까.' 그런 생각이 스치자, 아름의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해." 아름이 걸음을 멈추고 소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너한테는 그냥 재밌는 이벤트 같은 거야?"
소라는 순간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아름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재밌다는 건, 너랑 있는 시간 자체가 재밌다는 거지. 만화 얘기는… 그냥 내가 표현을 잘 못해서 그런 거고." 소라가 어색하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덧붙였고, 그 서투른 해명에서 오히려 진심이 느껴졌던 탓인지, 아름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교문이 가까워지자 소라는 슬며시 팔을 풀었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조금 떨어진 거리를 유지한 채 각자의 반으로 걸어갔는데, 그 거리감이 새삼스럽게 아름의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
1교시 수업이 시작되고 담임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 동안, 소라는 책상 아래로 슬쩍 손을 뻗어 아름의 손끝을 살짝 건드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그 접촉만으로도 아름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옆자리 짝꿍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슬쩍 시선을 돌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은 재빨리 손을 거두고 필통에서 펜을 꺼내는 척했지만, 짝꿍의 시선은 여전히 아름의 얼굴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고, 그 눈빛 속에 담긴 것이 단순한 호기심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속으로 조금씩 불안이 쌓여갔다.
'제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면.'
수업 시간 내내 아름은 앞자리 소라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필기를 하고 있는 그 어깨선이 유독 눈에 밟혔다.
쉬는 시간이 되자 소라가 뒤를 돌아 아름에게 짧게 눈짓을 보냈고, 아름은 그 눈짓에 대답하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그 순간 짝꿍이 옆에서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뭐 있어?"
그 한마디에 아름의 심장이 얼어붙듯 멈춰버렸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저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