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청람고등학교 1학년 3반 교실에는 아침 햇살이 창틀을 따라 비스듬히 내려앉아 있었고, 유리창을 투과한 그 빛은 먼지 하나까지 선명하게 비추며 교실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윤아름은 그 빛줄기 아래 자리에 앉아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수학 문제집을 펼쳐 놓은 채 조용히 펜을 굴리고 있었는데, 아직 아이들이 다 등교하지 않은 이른 시각이라 교실 안은 몇몇의 소곤거리는 목소리만 낮게 울릴 뿐 대체로 조용했다.
문제집 위에 그려진 도형 하나를 노려보며 아름은 미간을 살짝 좁혔고, 어제 밤 늦게까지 풀리지 않던 각도 문제가 여전히 답을 내주지 않아 펜 끝으로 종이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중학교 3년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한소라가 같은 반, 게다가 바로 옆자리에 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아름의 하루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어릴 때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 매일같이 붙어 다녔던 두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가 끝나면 어김없이 소라의 집 마당에서 함께 숙제를 하고, 여름이면 마당 수돗가에서 물장난을 치다가 둘 다 흠뻑 젖은 채로 소라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아름의 머릿속 어딘가에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소라의 가족이 갑작스레 이사를 가게 되면서 연락이 끊겼고, 처음 몇 달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그마저도 흐지부지되면서 그렇게 삼 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다시 마주하게 된 소라는 예전보다 훨씬 키가 자라 있었고, 웃는 얼굴도 더 화사해져 있었으며, 예전의 통통했던 볼살이 사라지고 대신 또렷한 눈매와 갸름한 턱선이 자리를 잡아 어릴 적 얼굴과 겹쳐 보이면서도 낯선 인상을 풍겼다.
"아름아, 아름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름은 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소라가 두 팔로 아름의 목을 감싸듯 뒤에서 끌어안으며 뺨을 어깨에 갖다 대었는데, 그 온기가 셔츠 너머로 스며드는 느낌에 아름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소라의 머리카락에서 옅은 샴푸 향이 풍겨왔고, 그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향기에 아름의 가슴 한켠이 이상하게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수업 시작하기 전인데, 좀 떨어져." 아름이 무심한 척 팔을 슬쩍 밀어내며 말했지만, 소라는 오히려 팔에 힘을 주며 더 바짝 붙어왔다.
"싫어. 삼 년이나 못 봤는데 이 정도는 봐줘야지." 소라가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아름의 볼에 자신의 볼을 살짝 문질렀고, 그 순간 반 아이들 몇몇이 힐끗거리며 지나갔지만 소라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저러다 누구 눈에 띄면 어쩌려고.' 아름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정작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놓지는 못했다.
앞자리에 앉은 몇몇 여자아이들이 소라와 아름을 번갈아 쳐다보며 뭔가 소곤거리는 것 같았는데, 아름은 그 시선들이 등 뒤로 따라붙는 것 같아 괜히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소라는 원래도 애정 표현이 많은 편이었지만, 재회한 뒤로는 유난히 그 정도가 심해졌다는 느낌을 아름은 종종 받았는데, 그것이 단순히 그리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소라는 아름의 책상 위에 슬쩍 초콜릿이나 사탕을 올려두고 갔고, 그럴 때마다 아름은 고개를 들어 소라를 바라보았지만 소라는 이미 딴청을 부리며 창밖을 보고 있는 척했다.
급식실에서는 항상 옆자리를 맡아두었는데, 어쩌다 아름이 조금 늦게 도착하면 소라는 벌써 식판 두 개를 나란히 놓고 손을 흔들며 부르곤 했다.
체육 시간에는 짝을 지을 때마다 누구보다 빠르게 아름의 손을 붙잡았고, 그 손이 늘 따뜻해서 아름은 매번 조금 당황하면서도 굳이 손을 빼지 않았다.
한번은 배드민턴 짝을 정하는데 다른 아이가 먼저 아름에게 다가오려 하자, 소라가 한 발 앞서 아름의 팔을 낚아채며 "얘는 나랑 할 거야"라고 단호하게 말해버린 적도 있었는데, 그때 아름은 뭐라 반박할 틈도 없이 소라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그날도 종례가 끝난 뒤, 소라는 아름의 팔을 붙잡고 텅 빈 옥상 계단으로 이끌었다.
계단을 오르는 소라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다는 것을 아름은 어렴풋이 느꼈고, 손목을 붙잡은 소라의 손에 미묘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도 알아챘지만, 딱히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그저 끌려갔다.
"할 말 있어서." 소라가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는데, 그 낯선 진지함에 아름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조금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계단 창문으로 붉은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고, 소라의 얼굴에 그 빛이 닿아 있었는데,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 대신 낯선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계단참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멎은 이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멀리서 운동장 쪽 아이들의 함성만이 아득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뭔데, 갑자기." 아름이 물었지만, 소라는 한동안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결국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입을 열었다.
"나, 너 좋아해." 소라의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짧지 않았다.
아름은 순간 귓속이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고,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 몇 번이나 소라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온갖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와 아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고, 그 여파로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을 아름은 애써 감추려 주먹을 살짝 쥐었다.
"장난치는 거 아니지." 아름의 물음에 소라는 대답 대신 한 걸음 더 다가섰고, 계단 벽에 등을 기댄 아름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벽의 차가운 감촉과 대조적으로, 눈앞의 소라에게서 느껴지는 온기가 아름의 감각을 더욱 뒤흔들었다.
소라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아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 속에는 여느 때처럼 장난기 어린 웃음이 아니라, 낯설도록 곧은 진심 같은 것이 담겨 있어서, 아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말았다.
계단 창밖으로 스며드는 붉은 빛이 소라의 옆얼굴을 타고 흐르며, 그 윤곽선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마주한 아름은 이제까지 알던 소라와는 전혀 다른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대답, 지금 안 해도 돼." 소라가 낮게 속삭였는데, 그 말과 동시에 소라의 손이 슬며시 다가와 아름의 손목을 다시 붙잡았고, 그 손의 온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아름의 피부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아름은 그 손을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몸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소라의 눈빛에 붙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