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날 이후로 서은채와 나 사이에는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강의실 창문으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마저 예전과는 다른 온도로 느껴질 만큼, 우리 둘 사이엔 이제 서로만 아는 비밀 하나가 무겁게 얹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 옆자리에 앉았고, 나는 여전히 그녀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 노트북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수업을 들었지만, 곁눈질로 흘러드는 그녀의 존재감은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잔상처럼 자꾸만 신경을 긁어댔다.
강의가 끝나갈 무렵, 교수님의 마지막 당부가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지나가듯 물었다.
"오늘 방송 몇 시에 해요?"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다들 가방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나는 낮게 대답했다.
"…열두 시요."
"봐도 되죠?"
"어차피 보고 있었으면서 뭘 물어요."
나도 모르게 냉소적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녀가 나를 빤히 보더니 픽 웃었다. 그 웃음에는 어딘가 여유가 배어 있어서, 마치 나의 방어적인 태도조차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네요."
그 웃음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웃음,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말투. 나는 그 기시감의 근원을 잡으려다 이내 놓쳤다. 채팅창에서 자주 보던 닉네임 하나가 스쳐 지나갔지만, 확신할 수 없는 기억이란 늘 그렇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법이었다.
가방을 챙겨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그 한 마디에 나는 저도 모르게 동작을 멈췄다.
"왜 얼굴 안 보여줘요? 목소리도 좋고, 요리도 잘하는데."
질문이 너무 직설적이라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져서, 나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건…"
대답을 미루자 그녀의 눈빛이 조금 서늘해졌다. 강의실의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그 눈빛만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말 안 해줘도 돼요. 그냥 궁금해서."
그녀는 가방을 어깨에 메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더 캐묻지 않고 자리를 떠났지만, 나는 그 질문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느냐고, 나 자신에게도 수백 번 물어봤던 질문이었다.
답은 언제나 같았다.
얼굴을 보이면 배경이 아니게 되니까. 그리고 배경이 아니게 되는 순간, 나는 또 상처받을 게 뻔했으니까.
몇 년 전, 그 일이 있었을 때도 나는 그렇게 배웠다. 관심을 받는다는 건 곧 실망을 안겨줄 여지를 만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조용히 있을 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다가, 내가 무언가를 잘한다는 걸 알게 되면 갑자기 그 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남는 건 실망한 표정뿐이었다.
그러니까 얼굴 없이, 목소리만으로, 배경으로 남는 게 나았다.
그날 오후, 학과 사무실 앞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이도현!"
오하늘이었다. 관광경영학과 소속이지만 문창과 수업을 몇 개 듣고 있어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사이였다. 밝은 성격에 늘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나와는 정반대의 부류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복도 끝까지 울릴 만큼 컸고, 그 쾌활함이 오늘따라 유독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어, 안녕."
나는 최소한의 반응만 하고 지나가려 했지만 그녀가 굳이 옆으로 붙어 걸음을 맞췄다. 신발 소리가 나란히 복도를 울리는 게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저번에 학식에서 봤을 때 계란말이 얘기했잖아, 기억나?"
"…그런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 척하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았다.
"내가 계란말이 진짜 좋아한다고 했는데, 니가 뭔가 되게 구체적으로 레시피를 알더라고. 파 넣는 순서까지."
순간 손끝이 저릿해졌다.
설마.
방송에서 계란말이 레시피를 설명했던 게 언제였더라. 채팅창에 파를 어느 타이밍에 넣는 게 좋은지 물어보는 시청자가 있었고, 나는 그 질문에 꽤 자세하게 답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그 채팅창에 오하늘이 있었던 건가.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냥… 요리 좋아해서."
"그래?"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지나치게 흥미로워 보여서, 나는 무언가 잘못 흘렸다는 불안을 지울 수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근데 그거 알아? 나 요즘 진짜 재밌게 보는 요리 방송 있는데, 목소리만 나오는 거."
목이 탔다.
"…그래요?"
"응, 근데 그 사람 진짜 웃긴 게, 시청자들이랑 대화하는 스타일이 되게 익숙한 느낌이야. 어디서 본 사람 같기도 하고."
그녀는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바늘처럼 느껴졌다.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걸음을 옮겼지만, 심장은 이미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도대체 왜…
왜 하필 두 사람이 동시에 이 근처를 맴돌기 시작한 걸까.
서은채가 알아챈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오하늘도 조금씩 진실의 가장자리를 더듬고 있었다. 서은채는 확신에 가까운 눈빛으로 다가왔고, 오하늘은 순수한 호기심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 끝이 같은 지점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점점 더 좁아지는 틈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멀어지는 오하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애꿏은 생각을 곱씹었다. 만약 저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된다면, 만약 그 정보가 겹쳐진다면, 나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질 것이었다.
그날 밤, 방송을 켜기 전 나는 유난히 오래 마이크를 만지작거렸다. 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켰을 화면이 오늘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괜찮을까.
혼자 되묻는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