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모브 소년의 히로인 구제

5화

한서아는 교무실을 나서면서 머릿속으로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 ──이도현이라는 학생. 입학생 명단 어디에도 특이사항이 없는, 완전히 평범한 배경 인물.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그가 보인 행동은 평범한 학생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났다. 박성민의 편집증적 동선 심리를 예측한 것, 서은채가 창밖을 내다볼 타이밍까지 계산한 듯한 유도. 이건 우연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정보'를 가진 사람의 행동 패턴이었다. 문제는 그 정보의 출처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시험 문제를 미리 받아본 사람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답안지를 쓰는 손에 망설임이 없었다. 한서아는 그 망설임 없음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윤소하는 걸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아가 저렇게 날카롭게 캐물었는데도 저 아이는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다. 겁먹은 기색은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어릴 때 만난 적이 있었나.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오늘 처음 본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손끝이 자꾸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사라진 복도에 한참을 서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방금까지 나를 스캔하던 두 개의 레이더가 사라졌는데도, 몸은 아직 경보를 해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욥기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어디 있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먹다 버스에 치여 죽어 있었다고. 주여, 그때 저는 원플러스원 행사 상품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참회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한서아라는 캐릭터는 원작에서도 최상위 지능 스탯을 가진 인물이었다. 회귀자 특전이니 예지력이니 하는 설정 자체가 없는 세계관에서, 그녀는 순수하게 '관찰과 추론'으로 사람을 해체하는 유형이었다. 그 말은 즉, 오늘의 '우연'도 그녀 머릿속에서는 이미 하나의 가설로 정리되어 서랍에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우연'으로 넘어가는 것도 딱 이번 한 번뿐일 거였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나는 완전히 발각될 확률이 높았다. 발각되면 어떻게 되나. 상상해봤다. '이도현, 미래를 아는 학생' 같은 타이틀로 교내 방송에 나가는 그림은 아무래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흑룡파 정략결혼 라인 근처에서 그런 소문이 돌면 나는 그날로 한강 물고기 밥이 될 확률이 훨씬 높았다. 문제는 그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거였다. 더 큰 문제는 서은채였다. 방과 후, 나는 다시 음악실로 향했다. 박성민 사건 이후로 서은채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야 했다. 걸어가는 내내 나는 원작 타임라인을 복기했다. 이 시점 이후로 서은채의 서사는 크게 두 갈래로 갈렸다. 하나는 서서히 사람을 다시 믿기 시작하며 밴드부 활동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루트. 다른 하나는, 유일하게 자신을 구해준 존재에게 감정을 과몰입시켜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루트. 원작 소설에서는 후자였다. 그 뒷맛이 얼마나 씁쓸했는지,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복도 창문으로 비치는 노을이 붉었다. 마치 경고등처럼. 음악실 문을 열자, 서은채가 기타 대신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화면 불빛이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비추고 있어서, 순간 조금 낯선 인상이었다. "왔어요?" 말투에 확실히 변화가 있었다. 어제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경계하는 유기묘 같은 눈빛이었는데, 오늘은 그 경계가 반쯤 풀려 있었다. "괜찮아요?" "박성민 얘기라면, 뭐. 괜찮아요." 서은채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스마트폰 케이스를 만지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리듬을 놓치고 있었다. 트라우마는 겉으로 괜찮아 보이는 것과 별개로 계속 남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전생에도 이런 케이스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겉은 멀쩡하게 웃고 있는데 속은 여전히 그날의 복도에 갇혀 있는 사람들. 원작에서 이 시점의 서은채는 표면적으로는 안정을 찾지만, 내면에서는 오히려 '자신을 구해준 유일한 사람'에게 급격히 집착하기 시작하는 심리적 전환점을 맞는다. 그 집착이 처음에는 감사와 존경의 형태를 띠다가, 서서히 소유욕과 불안으로 변질된다는 게 문제였다. 상대가 자신 외의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게 되는 단계까지 진행되면, 그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었다. 지금 내가 그 대상이 됐다는 뜻이었다. "저기, 도현씨." 서은채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성까지 붙여서. 존댓말로. 그런데 그 존댓말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네?" "저 원래 사람 잘 안 믿어요. 특히 남자는 더." 그 말을 하면서 서은채는 시선을 살짝 피했다. 창밖 쪽을 보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 "근데 도현씨는 좀 다른 것 같아서." 공기가 순간 무거워졌다. 음악실 특유의 방음벽 때문인지, 바깥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 그 말만 유독 크게 울렸다. [전도서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지금은 좋아해야 할 때가 아니라 조심해야 할 때였다. 나는 원작 지식으로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순간, 서은채가 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갈림길이었다. 건강한 신뢰로 이어지면 그녀는 살아난다. 하지만 이게 병적인 의존으로 변질되면, 원작에서 결국 자멸했던 그 패턴이 나를 대상으로 재현될 수 있었다. 원작에서 그 패턴이 어떻게 끝났는지,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자신을 밀어내려는 순간, 서은채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리고 그 끝은 항상 좋지 않았다. 내가 그 결말의 다음 챕터에 등장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저 다음에도 여기 와도 돼요?" 서은채가 물었다. 목소리에 기대가 배어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던 손이 어느새 멈춰 있었다. 시선은 완전히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지금 무조건 '좋다'고 하면 이 아이의 세계에서 유일한 안전지대가 나 하나로 좁혀질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거절하면, 겨우 쌓은 신뢰가 다시 무너질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답변을 시뮬레이션 해봤다. "매일 와도 돼요"는 최악. "오지 마요"도 최악. 이건 마치 부동산 계약서에 도장 찍기 직전에 특약사항 협상하는 기분이었다. 너무 풀어주면 나중에 골치 아프고, 너무 조이면 계약 자체가 깨진다. "...네, 가끔은요." 애매한 대답을 했다. 최선이었다고 스스로 믿었다. 서은채는 그 대답에 만족한 듯 살짝 웃었다. 그 미소가 이상하게도 마음에 걸렸다. 만족스러운 미소라기보다는, 확답을 받아냈다는 종류의 미소였다. 음악실을 나서면서, 나는 오늘 벌어진 일들을 정리했다. 박성민 사건은 종결됐다. 서은채와의 관계는 시작됐다. 한서아는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윤소하는... 뭔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루 사이에 세 개의 폭탄을 동시에 떠안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각각 다른 타이머로 돌아가는 폭탄들. 원작 지식이라는 무기는 강력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얼마나 갈아 넣어야 유지되는 무기인지, 나는 아직 제대로 계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알 없는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온 기분이었다. 방아쇠는 당길 수 있는데, 그 다음이 없는. 그날 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서은채, 한서아, 윤소하. 세 사람의 원작 타임라인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트 첫 줄에 서은채의 이름을 적고, 그 옆에 '집착 곡선 상승 구간'이라고 썼다. 그다음 줄에 한서아의 이름을 적고, '관찰 대상 등록 완료'라고 썼다. 마지막으로 윤소하의 이름을 적었는데, 뭐라고 써야 할지 한참 손이 멈췄다. '낯선 눈빛'이라고 적었다가 지웠다. '경계 대상인지 아닌지 불명'이라고 적었다. 다음 위기는 언제 올까.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낚기도 전에, 리워야단 쪽에서 먼저 나를 알아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이 이야기의 배후에 있던 또 다른 존재들에게도 이미 도달해 있었다. * 도시 외곽, 낡은 건물 지하. 흑룡파라 불리는 조직의 사무실에서, 중년 남자 하나가 서류 한 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며 사무실 안을 불규칙하게 밝혔다. 책상 위에는 재떨이와 서류철, 그리고 낡은 지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조직의 간부는 서류를 넘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정략결혼 대상으로 낙점된 한서아 주변에 뜬금없이 등장한 이름 없는 학생. 학교 내부 정보망을 통해 올라온 보고서에는, 이 학생이 사건을 예측한 것처럼 움직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정밀했다. 그리고 이 조직은, 우연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서류 하단에는 학생의 이름과 사진이 붙어 있었다. 평범한 교복을 입은, 평범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간부는 그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정확히 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오랜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이 얼굴은 다시 마주치게 될 얼굴이라고.── "이 이도현이라는 놈, 뭐야." 간부는 서류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연기 한 줄기가 재떨이 위에서 느리게 흩어졌다. "조사해. 이 새끼, 뭔가 있어." 낮은 목소리가 지하 사무실을 채웠다. 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넵.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서류가 다시 파일 안으로 들어갔다. 그 파일 표지에는 작게 '이도현'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서울 어딘가의 평범한 학교, 평범한 옆자리, 평범하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는, 그 순간 자신이 이미 어떤 시선 속에 들어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책상 위 노트에는 여전히 세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고, 나는 그 옆에 네 번째 이름을 적을 자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조차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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