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윤소하는 옆자리에서 조용히 창밖만 보고 있었다.
첫날부터 대화를 트기엔 어색했고, 무엇보다 내 머릿속은 다른 걸로 꽉 차 있었다.
서은채를 찾아야 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상황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눈 떠보니 웹소설 속 서브 남주로 들어와 있고, 원작 남주인 정하준은 존재감이 없고, 히로인들은 각자의 파멸 루트를 향해 시한부처럼 걸어가고 있는 상황.
누가 이걸 보고 '이세계 힐링물'이라고 할까.
[전도서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옛날 사람도 이런 반복되는 파국을 봤나 보다. 다만 나는 지금 그 반복을 끊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게 문제였다.
원작 시나리오에서 서은채의 파멸 트리거는 입학 후 이 주 안에 발생한다. 학교 축제 준비 기간, 인디 밴드 활동을 하던 서은채가 자신을 스토킹하던 박성민에게 표적이 되는 사건. 정하준이 있었다면 우연히 마주쳐 구해준다는 클리셰 그 자체의 전개였다.
정하준이 없으니, 그 우연을 누군가 대신 만들어야 했다.
윤소하 쪽을 슬쩍 봤다. 이 녀석도 원작에 이름 한 줄 없는 오리지널 캐릭터였다. 그러니 나처럼 정해진 대본이 없다는 뜻이고, 정해진 대본이 없다는 건 이 녀석이 뭘 할지 나도 예측 못 한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그냥 창밖만 보고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언젠가 이 녀석도 사건에 얽힐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일단 오늘은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급한 불은 서은채였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나는 가방을 챙기며 속으로 타임라인을 복기했다. 입학 첫날, 방과 후, 음악실. 여기서 첫 접점을 만들지 못하면 서은채 루트는 통째로 봉쇄된다. 원작 유저들 사이에서 '최고 난이도 히로인'으로 유명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다.
방과 후, 나는 음악실 쪽으로 걸었다.
복도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신발장 냄새와 낡은 마룻바닥 냄새가 섞인,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냄새였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심장이 미묘하게 빨리 뛰었는데, 이게 설렘인지 그냥 순수한 압박감인지는 나도 잘 몰랐다.
원작에서 서은채가 자주 연습하던 그 장소였다. 유리창 너머로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흘러나왔다.
[시편 137:2, 그 가운데서 우리가 하프를 걸었나니]
걸어놓기만 하지 말고 좀 쳐봐라, 저기 쳐지고 있잖아.
혼자 실없는 농담을 하며 문을 열었다.
문고리는 살짝 뻑뻑했다. 오래된 경첩 특유의 끼익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기타 소리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신경 안 쓴다는 듯한 태도였다.
서은채는 창가에 걸터앉아 기타를 치고 있었다.
긴 생머리, 새하얀 피부, 무표정한 얼굴. 원작 CG 그대로였다.
다른 게 있다면, 화면 속 정지된 그림이 아니라 진짜로 눈을 깜빡이고 진짜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뿐.
이상하게도 그 사소한 차이가 제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2D로만 보던 얼굴이 3D로, 그것도 풀 프레임으로, 심지어 나를 경계하는 눈빛까지 완비해서 눈앞에 있다는 게.
"...누구세요."
서은채의 목소리에는 온도가 없었다.
원작 대사 그대로였다. 낯선 사람에게 처음 건네는 이 대사, 여기서부터 호감도 루트가 갈린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바로 -10, 두 번 잘못 대답하면 강제 종료. 게임이었다면 나는 이미 로드를 세 번쯤 했을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여긴 세이브 포인트가 없다.
"저, 그냥 지나가다가 소리가 좋아서요."
뻔한 거짓말이었다.
서은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경계심이 한 단계 올라간 증거였다.
"지나가다 우연히 여기 왔다고요?"
"네."
"음악실은 3층 안쪽인데요."
아, 이건 좀 아팠다.
지리적으로 완전히 말이 안 되는 위치였다. 여기까지 오려면 최소 두 개의 계단과 세 개의 복도를 거쳐야 하는데, '지나가다'라는 표현이 성립할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
"길을 잃었어요."
나는 눈을 굴리며 답했다. 최선의 임기응변이었다.
사실 최선이라기보다는, 머릿속에 떠오른 유일한 선택지였다는 게 더 정확했다.
서은채는 잠시 나를 훑어보다가, 다시 기타로 시선을 돌렸다.
무시당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호감도 정보 없음. 관찰 지속 중]
이런 메시지가 실제로 뜨면 참 편했을 텐데, 이 세계는 그런 편의 기능조차 없었다. 나는 순전히 감으로 상황을 읽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됐다.
원작에서 서은채가 가장 경계하는 건 '접근'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갈망하는 건 '순수한 호의'였다.
박성민 같은 광적인 집착이 아니라, 아무 이해관계 없이 그냥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
문제는 그 '순수한 호의'라는 걸 어떻게 대사로 구현하느냐였다. 진지하게 말하면 부담스러워하고, 가볍게 말하면 경박하다고 여긴다. 이 경계선을 정확히 밟아야 했다.
"곡 좋네요. 제목이 뭐예요?"
"...몰라도 돼요."
"아, 그럼 제가 하나 지어드릴까요. '3층 안쪽 음악실 습격사건' 어때요."
서은채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표정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웃음을 참는 균열.
"뭐예요, 그거."
"제 별명이라도 지어주세요. 저는 지금부터 '길 잃은 애'로 불릴 예정이라."
"...하."
짧은 실소였다. 아주 짧았지만, 나는 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다.
원작 최고 난이도로 평가받던 서은채의 첫 호감도 이벤트를 첫 만남에서 클리어했다는 뜻이었다.
코끝이 찡해졌다.
농담이다. 사실은 그냥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첫 대화에서 실패하면 이후 루트 자체가 봉쇄되는 캐릭터였으니까. 실패했다면 나는 지금쯤 문 앞에서 정중하게 쫓겨나 있었을 것이다.
"이름이 뭔데요."
"이도현이요."
"들어본 적 없는데."
"당연하죠, 저 완전 존재감 없거든요."
서은채는 이번엔 확실히 웃었다. 아주 옅게, 그러나 분명히.
그 웃음을 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남의 서사에 굴러들어온 조연 같았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뭔가 스토리를 바꾸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아주 작은 실감이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기타는 언제부터 쳤어요?"
"...알아서 뭐 해요."
"그냥, 궁금해서요. 저는 악기 하나도 제대로 못 다루거든요."
"그럼 왜 물어요."
"못 하니까 잘하는 사람이 신기해서요."
서은채가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기타 줄을 만졌다. 대답은 없었지만, 대화를 완전히 끊지도 않았다. 이 미묘한 온도 유지가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의 결과였다.
창밖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음악실 안이 붉게 물들었다. 원작에서 이 장면은 배경음악과 함께 성우의 나레이션이 깔리는 명장면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내가 어색하게 서 있는 현실이었다.
배경음악도 없고, 나레이션도 없고, 그냥 낡은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노을빛과 먼지 냄새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어떤 CG보다 생생했다.
"저기, 다음에 또 여기 와도 돼요?"
"...마음대로 하세요."
허락인지 무관심인지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걸 허락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런 애매함을 긍정으로 해석하는 게 이 바닥의 국룰이었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음악실을 나서면서 나는 스스로를 칭찬했다.
첫 접촉 성공. 이제 남은 건 박성민의 접근을 막는 것뿐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오늘 일을 곱씹었다. 생각보다 수월했다. 어쩌면 정하준이 없어도, 원작의 흐름을 조금씩 비틀어가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원작 타임라인대로라면, 박성민의 첫 행동은 오늘 밤이었다.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낚을 필요 없다. 오늘은 그냥 미끼가 안 물릴 거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원작에서 박성민의 첫 접근은 축제 준비 기간 중 서은채가 늦게까지 연습하다 혼자 하교하는 밤에 벌어졌다. 오늘은 그 축제 준비 기간이 아니었다. 아직 입학 첫날이었으니, 시간표상으로는 안전할 거라 계산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나는 곧 뼈저리게 깨닫게 됐다.
학교 정문을 나서는데, 어둠 속에서 낯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체육복 차림, 부스스한 머리, 그리고 무엇보다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
가로등 불빛이 깜빡거렸다. 하필 그 남자가 서 있는 자리 바로 위였다.
박성민이었다.
원작에서 본 CG보다 훨씬 초췌하고 훨씬 위태로운 얼굴로.
원작에서는 이 인물이 등장할 때 항상 클로즈업과 함께 불안한 배경음이 깔렸다. 지금은 그런 연출 없이, 그냥 어두운 골목 한 켠에 실체로 서 있었다. 연출이 없어서 더 무서웠다.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내 등 뒤, 음악실이 있는 건물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의 방향, 자세, 손에 쥔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습관적인 손동작까지. 원작 텍스트에서 묘사됐던 그 모든 디테일이 눈앞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타임라인이 이미 앞당겨졌다는 걸, 나는 그 순간 알아챘다.
가로등이 다시 한번 깜빡였다. 그 짧은 어둠 속에서, 박성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