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모브 소년의 히로인 구제

3화

박성민은 손에 커터칼을 쥐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이 장면이 그냥 텍스트 몇 줄로 처리됐다. '서은채는 위기에 처했다', '정하준이 그녀를 구했다' 딱 두 문장. 두 문장 안에 압축된 폭력이, 지금 내 눈앞에서 실물로 재생되고 있었다. 날붙이 특유의 반질반질한 광택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번쩍였다. 저게 진짜 사람을 벨 수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뒤늦게 실감 났다. 게임 속 텍스트로 읽을 때는 그냥 '흉기'라는 단어 세 글자였는데, 실물로 보니까 이렇게 존재감이 클 줄이야. "야, 너 뭐야." 박성민이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오늘 은채 만났지. 봤어. 다 봤다고." "...누구세요?" 나는 시치미를 뗐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원작 지식에 따르면 박성민은 편집증적 집착형 스토커다. 서은채의 SNS를 매일 감시하고, 그녀가 다니는 학원, 자주 가는 카페, 심지어 노선버스 시간표까지 외우고 있는 캐릭터였다. 개인정보 스토킹계의 특급 마스터랄까. 만약 이 세계에 흥신소가 있었다면 박성민은 이미 자격증 세 개는 땄을 거다. 음악실에서 만난 지 채 두 시간도 안 됐는데 이미 알고 있다는 건, 학교 안 어딘가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CCTV 없는 사각지대만 골라서 움직인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이 학교엔 CCTV가 몇 대나 있는데. 근데 저 눈빛 보니까 그냥 다 뚫고 다녔을 것 같기도 하고. "은채한테 가지 마." "저기요, 진정하시고..." 목소리가 최대한 침착하게 나오도록 애썼다. 사실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상담 선생님 톤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그냥 친구 톤으로 가야 하나, 순간적으로 어투를 고르는 나 자신이 웃겼다. 이 와중에도 대화 전략을 짜고 있다니. 뇌가 참 성실하다. "가지 말라고!" 촤악! 커터칼이 허공을 그었다. 다행히 빗나갔다. 다행이라는 말이 이렇게 절박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칼끝이 지나간 자리의 공기가 훅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진짜로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게 신기했다. 아니, 신기하다는 감상을 할 때가 아니었지. 죽을 뻔했잖아 지금. [전도서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지금은 도망칠 때다. 아니, 도망칠 때가 아니지. 도망치면 저 사람은 다시 음악실 쪽으로 갈 텐데. 전도서 형님, 저도 압니다. 문제는 그 '때'를 놓치면 서은채가 대신 저 칼을 맞는다는 거죠. 나는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위치를 계산했다. 박성민의 동선을 서은채와 반대 방향으로 유도해야 했다. 머릿속으로 학교 지도를 펼쳤다. 음악실, 급식실, 정문, 후문, 그리고 지금 서 있는 이 공터. 전생에 배달 알바 할 때 외웠던 골목 지도 실력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저기 저 골목으로 가야 은채한테 갈 수 있어요!"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편집증 환자에게는 오히려 이런 단순한 정보가 잘 먹힌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복잡한 논리를 들이대면 오히려 의심하고, 단순하고 확신에 찬 정보일수록 그대로 먹히는 게 이런 유형의 특징이었다. 스토커 심리학 강의를 들은 것도 아닌데, 원작 지식이 이럴 때 참 유용하다. 박성민은 잠깐 흔들렸다. 그 틈에 나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쾅! 등 뒤에서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박성민이 쫓아오고 있었다. 쓰레기통을 걷어찼는지 뭔가 굴러다니는 소리도 들렸다. 저러다 넘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넘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집착이란 그런 거니까. 도망치는 것도 재능이 필요하다는 걸, 나는 두 번째로 깨닫는 중이었다. 첫 번째는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났다. 아마 이 세계에 떨어진 첫날이었겠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골목을 세 개쯤 꺾었을 때, 나는 원작 지식 속 결정적인 정보를 떠올렸다. 박성민은 원작에서 정하준에게 제압당한 뒤, 경찰에 넘겨지기 전 딱 한 가지 반응을 보인다. 자신이 통제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폭력성이 급격히 무너지고 오열한다. 트리거는 '서은채가 자신을 무서워하는 표정을 직접 목격하는 것'이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이 세계에서 논리는 게임 시나리오의 논리를 따른다. 나는 그걸 이용해야 했다. 사기꾼 같은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사람 감정을 트리거 삼아 조종하는 거니까. 근데 지금 이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고민할 여유 같은 게 있었으면 애초에 도망도 안 쳤을 거다. 숨을 몰아쉬며 다시 방향을 잡았다. 발바닥이 아스팔트에 부딪히는 감각이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운동화 밑창이 다 닳은 것 같았다. 이 몸으로 전학생 코스프레만 한 게 아니라 100미터 달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저기! 은채 저기 있어요!" 나는 다시 골목을 꺾어 음악실 건물 앞 공터로 유도했다. 타이밍이 완벽하다면, 서은채도 소란을 듣고 창밖을 내다볼 시간이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 뒷일을 계산할 여유가 없었다. 예상대로였다. 음악실 창문이 열리고, 서은채의 얼굴이 나타났다. "...박성민?" 서은채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새어 나왔다. 두려움이었다. 늘 무표정하던 그 얼굴이, 지금은 하얗게 굳어 있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저 표정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원작 텍스트로 읽을 때는 그냥 '두려움에 떠는 여주'라는 한 줄이었는데. 박성민이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정말로 원작대로 몸이 굳었다. 손에 쥔 칼끝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방금까지 사람을 위협하던 존재가 갑자기 겁먹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은채야, 나는... 나는 그냥..." 칼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전생 기억 속 어설픈 유도 상식 하나를 떠올리며 박성민의 팔을 낚아채 등 뒤로 꺾었다. 촤르르르륵! 실제로는 사슬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내 팔이었지만, 체감상 그 정도 소리가 났다. 박성민은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집착은 강했지만 육체는 평범한 고등학생 그 자체였다. 헬스장 한 번도 안 가본 것 같은 팔 힘이었다. 스토킹에 쓸 시간을 운동에 좀 나눠 썼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참 쓸데없이 스쳤다. [욥기 6:11, 나의 기력이 어찌 그리 다시 강건하여 참고 견디랴] 버둥거리는 힘도 딱 그 정도였다. 욥기 형님 말씀대로, 기력이 다시 강건할 리가 없지. 이 자식은 원래부터 그 정도였을 테니까. 박성민은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은채야 미안해..." 원작 그대로였다. 다만 이 대사를 받아내는 사람이 정하준이 아니라 나라는 것만 달랐다. 남주가 있어야 할 자리에 조연 하나가 헐떡이며 서 있는 그림. 원작 팬이 봤으면 분명 댓글 폭탄을 던졌을 광경이었다. 곧 경비 아저씨가 달려왔고, 경찰이 왔고, 소란은 정리됐다. 경비 아저씨는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면서 무전기를 붙잡고 있었고,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골목을 붉고 푸르게 물들였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는지 휴대폰 플래시가 몇 번 터졌다. 다음 날 학교 익명 커뮤니티에 이 사건이 올라올 걸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팠다. 박성민은 접근금지 명령과 함께 상담 조치를 받게 됐다는 소식이 다음 날 학교에 퍼졌다. 쉬는 시간마다 복도에서 애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전학생이 잡았대", "커터칼이었다며", "미친 거 아니냐" 같은 단어들이 파편처럼 귀에 꽂혔다. 나는 그냥 못 들은 척했다. 주인공 놀음 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원작에서는 이 사건이 완전한 종결점이었다. 정하준이 서은채를 구하고, 그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가 급진전한다. 그게 원작 서사의 전형적인 클리셰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서은채의 근본적인 인간불신은 이걸로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 캐릭터는 원작 후반부까지도 계속 사람을 밀어내는 서브플롯을 갖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마음의 문이 짜라락 열릴 사람이 아니었다. 서은채는 사건 다음 날 나를 찾아왔다. 쉬는 시간, 복도 끝 창가 자리였다.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온 걸 보니 이것도 나름 계산한 행동인 듯했다. "...고마워요." 짧은 한마디였다.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목소리 톤도 어제 창문 너머로 봤던 그 두려움 가득한 톤과는 완전히 달랐다. 다시 원래의 벽을 세운 모습이었다. "아니에요."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럴 때 괜히 감동적인 말 하나 얹으려다가 어색해지는 걸 몇 번 겪어봤기 때문에, 짧게 끊는 게 낫다는 걸 배웠다. "근데." 서은채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어제 두려움에 흔들리던 그 눈이 아니라, 뭔가를 캐내려는 사람의 눈이었다. "어제 그거, 어떻게 알고 그쪽으로 유도한 거예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원작 지식으로 알았어요'라고 할 수도 없고, '너희 스토커의 심리 트리거를 게임 시나리오처럼 파악해서 이용했어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은채의 시선은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뭔가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눈을 떼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시선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설픈 거짓말을 하면 오히려 더 의심을 사겠지. 근데 진실을 말할 수도 없고. 침묵이 길어질수록 서은채의 눈매가 점점 더 가늘어지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