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떴는데 전생이 기억났다.
정확히는 전생의 기억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서른두 살, 야근에 절어 살던 회사원. 퇴근길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을 먹다가 버스에 치여 죽었다는, 죽음의 방식마저 성의 없는 인생.
그리고 그 인생의 유일한 취미가 갤 게임이었다는 사실까지, 전부.
"미친."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났다.
천장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낯선 게 아니라 익숙했다. 익숙해서 더 소름 돋았다.
이 방, 이 침대, 이 벽지 무늬. 심지어 창밖으로 보이는 벚나무까지.
전부 내가 알던 배경이었다.
'그녀가 빛나는 계절.'
2010년대 중후반, 국내 인디 게임 개발사가 만든 미친 완성도의 갤 게임. 히로인 셋의 서사가 각각 독립된 소설 한 권 분량으로 짜여 있어서, 나 같은 폐인이 밤새 클리어하고도 다음 날 또 새로하는 그런 게임이었다.
심지어 이 게임, 발매 당시 커뮤니티에서 "이거 클리어하고 정신과 가야 되냐"는 게시글이 인기글 박제될 정도로 스토리가 지독했다.
그 게임 속 세계에, 내가 들어와 있었다.
[전도서 1:9, 이미 있던 일은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은 후에 다시 할지라]
그럴 리가.
다시 하는 게 아니라 이번엔 아예 안에서 사는 거잖아. 이거 완전 서비스 종료된 게임 계정 로그인했더니 캐릭터가 진짜로 살아 움직이는 거잖아.
나는 거울 앞에 섰다.
평균 이하의 키, 평균 이하의 얼굴, 평균 이하의... 뭐 하나 특출난 게 없는 몸뚱이가 거기 있었다.
이도현. 17세. 이 게임에 등장하지도 않는, 배경 취급 이름 없는 학생 3-B 정도의 위치.
하다못해 서브 남캐라도 됐으면 스토리라도 있지.
나는 그냥 없는 사람이었다. 존재감이 제로에 수렴하는, 게임 데이터베이스에도 안 잡히는 '학생 A' 같은 인생.
갤 게임 배경에 지나가는 행인 3, 그게 나였다.
이불을 정리하며 방 안을 둘러봤다. 책상 위 스탠드, 벽에 붙은 시간표, 학생증 케이스까지, 전부 게임 오프닝 CG에서 스쳐 지나가듯 나왔던 소품들이었다.
그때는 그냥 배경 소품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실제로 만지고 사는 게 되니까 기분이 묘했다. 마치 좋아하던 드라마 세트장에 이삿짐 싸들고 입주한 느낌이었다.
꼬르륵...
배는 정직하게 아침을 요구했다.
세계관이 무너지든 말든 밥은 먹어야 한다는 게 인간의 서글픈 본질이다.
식탁에는 이미 밥과 국이 차려져 있었다. 부모님은 출근하셨는지 보이지 않았고, 식탁 위에 포스트잇 하나만 붙어 있었다. '학교 늦지 마라.' 필체까지 어딘지 익숙해서 웃음이 나왔다.
밥을 씹으며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 게임의 스토리는 셌다. 세 명의 히로인, 각각 다른 방향으로 파멸한다.
서은채는 스토커에게 살해당하거나 인간불신 끝에 자살한다. 루트에 따라 갈리지만 둘 다 지옥이었다.
한서아는 조직폭력배와의 정략결혼에 끌려가다 심리적으로 완전히 붕괴한다.
윤소하는... 심장병으로 3학년 겨울,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는다.
원작에서 이 셋을 구원하는 건 오직 한 사람, 주인공 정하준이었다.
문무양도의 완벽한 남자. 세 히로인의 루트를 전부 살려내는 만능 키.
학업 성적 전국 상위권, 체육대회에서 만능 스포츠맨, 심지어 조직폭력배 회장 아들이랑 맞짱 떠도 안 지는 먼치킨. 게임 커뮤니티에서 "이 새끼는 반칙 캐릭터"라는 말까지 나온 인물이었다.
"정하준이 있으면 다 해결되는 거잖아."
혼자 중얼거리며 교복을 입었다. 넥타이가 삐뚤어졌다. 다시 풀고 매도 또 삐뚤어졌다.
전생에 넥타이 맬 일이 없었다는 게 이렇게 티가 날 줄이야.
어차피 나 같은 모브가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편의점이 보였다. 삼각김밥 진열대를 보자마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전생의 마지막 식사가 저거였는데.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입학식은 평범했다.
아니, 평범해야 했다.
강당은 봄볕이 스며들어 따뜻했고, 신입생들은 저마다 어색한 얼굴로 자리를 채웠다.
강당 단상 위에서 교장이 신입생 대표를 소개했다.
"한서아 학생, 앞으로 나와주세요."
또박또박한 걸음, 완벽하게 다린 교복, 흠결 없는 미소.
한서아였다. 원작 그대로, 완벽한 학생회장 자리를 예약해둔 존재.
등장하는 순간부터 강당 안의 시선을 전부 빨아들이는 그 존재감. 게임 스틸컷에서 보던 것보다 실물이 더 압도적이었다.
박수 소리 사이로 나는 명단을 훑었다.
입학생 명단 팜플렛에 인쇄된 이름들. 습관처럼, 전생의 게임 지식으로 익숙한 이름을 찾았다.
서은채. 있다.
한서아. 있다.
윤소하. 있다.
정하준.
없다.
"어?"
나는 팜플렛을 뒤집어봤다. 다시 앞으로.
혹시 반 편성 자료가 따로 있나 싶어 옆자리 애가 들고 있던 다른 유인물까지 슬쩍 훔쳐봤다.
없다.
전체 반 배정표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한 줄씩 다시 읽었다. 350명, 오타 하나 없이 가나다순으로 정렬된 이름들 속에.
입학생 350명 중 어디에도, 정하준이라는 이름이 없었다.
[욥기 6:11, 나의 기력이 어찌 그리 다시 강건하여 참고 견디랴]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주인공이 없다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건 무슨 얼리 억세스 버그도 아니고, 메인 캐릭터가 통째로 로드가 안 된 상황이었다.
DLC 예약구매 안 해서 주인공 캐릭터 슬롯이 빈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주인공 없이 시작하는 갤 게임이라니, 그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는데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강당을 나오면서 나는 발이 헛디뎌질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주인공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머릿속에서 게임 시나리오가 자동으로 재생됐다.
정하준이 없으면 서은채를 구할 사람이 없다.
정하준이 없으면 한서아의 정략결혼을 막을 사람이 없다.
정하준이 없으면 윤소하가 그 겨울에 혼자 죽는다.
세 사람 다, 예정대로 파멸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복도 창문으로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게임 오프닝에서 본 그 벚나무, 그 각도, 그 빛까지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더 끔찍했다.
뭐지, 이 기분.
마치 시한부 판정을 받은 세 사람의 사망 일정표를 나 혼자 손에 쥐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슨 저승사자 다이어리 대필 아르바이트생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마태복음 24:36,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되]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나는 알아.
서은채는 언제 죽는지, 한서아는 언제 무너지는지, 윤소하는 어느 겨울에 아무도 모르게 숨을 거두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날짜까지도. 심지어 계절의 온도, 그날 뉴스에 뜬 첫눈 소식까지.
문제는 딱 하나였다.
안다고 뭘 할 수 있는가.
나는 그냥 모브다. 학생 A, 배경 3-B. 스탯도 없고 스킬도 없고, 이름조차 게임에 안 나오는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세 사람의 죽음을 예약된 미래처럼 알고 있었다.
마치 배달앱에서 예상 도착 시간이 뜨는 것처럼, 정확하고 잔인하게.
이걸 알고도 아무것도 안 하면, 나는 어떤 인간이 되는 걸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려고 마음먹은 시점에서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다만 방법이 문제였다.
주인공 없는 세계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조연이라니.
전투력도 없고 매력 스탯도 없는 놈이 문무양도 먼치킨의 빈자리를 메우겠다는 건, 알바생 하나 그만뒀다고 사장이 직접 서빙 뛰겠다는 소리랑 다를 게 없었다.
그야말로 자살 행위다.
실제로 자살할 확률이 몇 퍼센트인지는 굳이 계산하고 싶지 않았다.
교실로 들어서면서 나는 명단을 다시 확인했다.
3반.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
문을 열자 이미 몇몇 애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들 낯선 얼굴, 낯선 이름들.
내 자리를 찾아 걸어가는 동안 심장이 괜히 두근거렸다. 원작 지식이 있는 것과 실제로 그 안에서 걸어 다니는 건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내 옆자리에 적힌 이름을 보고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윤소하.
그럼 그렇지.
세계는 나한테 선택권을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첫날부터 히로인 하나를 옆자리에 박아놓고 시작하는, 참으로 배려심 없는 세계관이었다.
의자를 빼고 앉는데, 창가 쪽에서 옅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고개를 돌리자 벌써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 여자애가 있었다.
가늘고 흰 손목, 유난히 창백한 낯빛. 원작 CG에서 봤던 그 얼굴이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 여리게, 실물로 앉아 있었다.
윤소하가, 아무것도 모른 채, 창밖의 벚꽃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옆얼굴을 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저 애는 지금부터 정확히 이 년 아홉 달 후, 아무도 없는 겨울밤에 혼자 숨을 거둔다.
그 사실을 나만 알고 있었다.
"저기."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떨렸다.
윤소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나는 이 이야기가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갤 게임이 아니게 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