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노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차가웠다. 도윤이 침대에서 내려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등이 벽에 닿았다. 차가운 벽지의 감촉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가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세요, 누나.
그 목소리에는 죄책감이라는 게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하다는 듯, 정말 몰라서 묻는다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겨우 물었다.
너 진짜 열여덟이야. 거짓말 아니지.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떨어진 후드티를 주워 입었다. 팔을 꿰는 동작이 느긋했다.
네, 이번 학년 시작하면서 됐어요. 다음 달엔 열아홉 되는데요.
그 말이 오히려 나를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열아홉이 되든 말든 지금은 열여덟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문제였다. 다음 달이 아니라 지금, 오늘 새벽이 문제였다. 나는 그 애의 태연한 표정을 보면서 속으로 숫자를 세어봤다. 열여덟. 고등학교 2학년, 아니면 3학년. 교복을 입으면 앳돼 보일 나이. 그런데 어젯밤엔 왜 그렇게 어른스러워 보였을까.
나는 노트를 내려다봤다. 표지가 낡은 무선 노트였다. 귀퉁이가 접혔다 펴진 흔적이 여러 번 있었다.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자꾸만 손끝으로 모서리를 문질렀다. 종이가 닳아 부드러웠다. 머릿속에서 온갖 단어들이 뒤섞였다. 미성년자. 형법. 신고. 뉴스. 포털 메인에 뜨는 자막들까지 떠올랐다. 여성, 미성년자와, 부적절한. 그러다 다시 생각했다. 열여덟이면, 성인은 아니지만 아예 애는 아니잖아.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게 위로가 되나. 그게 죄가 아니게 되나. 아무리 되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되물을수록 죄라는 단어가 더 선명해졌다.
도윤은 교복 셔츠를 찾아 팔을 꿰었다. 그 순간 어깨뼈가 얇게 도드라지는 게 보였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몸이었다. 그걸 보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열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계속 달아올랐다. 도윤이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와 앉았다. 침대 끝, 내 옆자리였다. 나는 몸을 조금 더 옆으로 옮겼다. 그가 그걸 눈치챘는지 안 챘는지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저 때문에 힘드시면 그냥 아무 말 안 할게요. 근데 후회는 안 해요.
나는 그를 쳐다봤다. 그 말이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화가 났다. 후회를 안 한다는 게 지금 할 소린 아니잖아.
그가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이 길었다. 그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럼 어떤 말을 해야 되는데요.
나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사실 나도 몰랐다. 뭘 원하는지, 뭘 말해야 이 상황이 정리되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아니면 이 모든 게 그냥 없었던 일이 되기를 바라는 건지, 그것조차 구분이 안 됐다. 방바닥은 여전히 차가웠고 나는 여전히 잠옷 위에 이불을 두른 채였다. 창밖에서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들어와 방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그렸다. 그 그림자가 도윤의 발치까지 닿아 있었다.
도윤이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에 뜬 시간을 확인하는 손짓이 익숙했다. 무심하게, 마치 매일 아침 반복하는 습관처럼.
저 학교 가야 돼요. 지금 나가면 지각은 안 해요.
그 말에 나는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그래, 맞다. 이 애는 오늘도 등교를 해야 하는 애였다. 도시락을 챙겨야 하고, 급식을 먹어야 하고,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하는 애였다. 그런 애가 지금 내 방 침대 끝에 앉아서 후드티 지퍼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를 문 앞까지 배웅하듯 걸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술이 아직 덜 깬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어젯밤 기억의 조각들이 파편처럼 튀었다. 조명이 어두운 술집, 그 애가 먼저 말을 걸었던 순간, 웃을 때 살짝 보이던 덧니. 나는 그 조각들을 억지로 밀어냈다.
현관에서 도윤이 신발을 신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운동화 끈을 묶는 손가락이 가늘었다.
누나, 번호 알려주실 수 있어요.
나는 순간 멈췄다. 이건 아니라고, 여기서 끝내야 한다고 머릿속에서는 계속 경고음이 울렸다. 지금 여기서 끊어야 한다고, 이대로 문을 닫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는 게 맞는 거라고. 그런데 입은 다른 말을 했다. 010으로 시작하는 숫자를 하나씩 불러줬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도윤이 그걸 받아 적으며 웃었다. 덧니가 살짝 드러났다.
저 진짜 연락할 거예요.
그러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는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바닥에 다시 주저앉았다. 손에 여전히 노트가 있었다. 도윤이 놓고 간 물건이었다. 펼쳐볼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남의 물건을 열어보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손끝이 표지를 넘기는 순간에도 나는 계속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건 그냥 돌려주기 위해 확인하는 거라고, 연락처가 적혀 있을지도 모르니까 확인하는 거라고.
첫 장에는 야경 사진들이 인쇄되어 붙어 있었다. 한강, 다리 불빛, 구름다리 아래 반사된 조명들. 사진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고 어떤 건 삐뚜름하게 붙어 있었다. 그 아래 짧은 메모들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노출 시간, 조리개 값, 그리고 옆에 작게 적힌 감상들. 비 온 다음 날이라 물빛이 좋았다, 사람이 없어서 오래 서 있었다, 같은 문장들이었다. 필체는 삐뚤빼뚤했지만 정성스러웠다.
나는 페이지를 한 장씩 넘겼다. 넘길수록 사진의 구도가 조금씩 나아지는 게 보였다. 처음엔 흔들린 사진이 많았는데 뒤로 갈수록 초점이 정확해졌다. 이 애가 이걸 얼마나 오래 해왔는지 짐작이 됐다. 그러다 마지막 장에서 손이 멈췄다. 어젯밤 날짜였다. 사진은 없었다. 대신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오늘 만난 사람, 이름 몰라요. 근데 잊고 싶지 않아서 적어놔요.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글씨가 조금 흔들려 있었다. 서둘러 쓴 것처럼, 혹은 뭔가에 취해서 쓴 것처럼. 가슴 안쪽이 이상하게 조여왔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도 모른 채로 노트를 덮었다. 표지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덮었다. 창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지나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모르는 번호였다. 액정에 뜬 숫자를 보는 순간 손가락이 그대로 굳었다. 받을까, 말까. 방금 헤어진 애가 벌써 전화를 걸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 진동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한참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