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두통이었다. 관자놀이가 아니라 아예 머리 전체가 벌겋게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고, 목구멍 안쪽에서는 쓴 술 냄새가 올라왔다. 소주였나, 아니면 그 뒤에 마신 뭔가 다른 것이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익숙한 천장 무늬를 확인했다. 벽지 귀퉁이에 물이 새서 생긴 얼룩, 그 모양이 늘 토끼 같다고 생각했던 그 자국이었다. 내 방이었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모르는 곳에서 깬 건 아니었으니까. 그 생각을 하며 나는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옆에서 이불이 들썩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숨소리가 하나 더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낯선 등이 보였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듯한 어깨였다. 어깨뼈가 얇게 도드라져 있었고 피부는 이상하게 하얬다. 숨소리는 고르고 느렸다. 나는 손끝으로 이불 끝을 살짝 잡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불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다시 황급히 내려놓았다. 벗은 등이었다. 아니, 우리 둘 다 벗고 있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기억이 조각조각 떠올랐다가 다시 흩어졌다. 홍대 어딘가의 골목, 낡은 간판에 불빛이 깜빡이던 술집, 그 앞에서 누군가와 소리를 지르며 웃었던 것 같다. 그다음은 한강이었다. 다리 아래 벤치에 앉아서 캔을 부딪쳤던가. 강바람이 차가웠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리고 이 방.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나는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손이 떨렸다. 누구였지, 그 누군가가.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웃음소리가, 유난히 앳된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일단 몸을 일으켰다. 침대가 삐걱, 낮게 울었다.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리는데 발끝에 뭔가 걸렸다. 옷더미였다. 내 원피스와 스타킹이 아무렇게나 뭉쳐 있었고, 그 옆에 웬 검은 셔츠와 회색 바지가 나란히 흩어져 있었다. 순서대로 벗어놓은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렇게나 내던진 모양새였다. 나는 그 바지를 집어 들었다가 순간 손이 굳었다.
교복이었다.
허리춤에 학교 마크가 박음질되어 있었다. 별 모양 세 개가 나란히 있는, 흔한 고등학교 로고였다. 나는 바지를 다시 내려놓았다. 손끝이 옷감에 닿았던 자리가 뜨겁게 남았다. 아니야, 요즘 애들은 캐주얼로도 저런 걸 입잖아. 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스트리트 패션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니까, 교복 느낌 나는 옷도 유행이니까.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그 옆에 놓인 검은 셔츠를 뒤집어보니 안쪽에 이름표가 박혀 있었다. 흰 실로 박음질된, 학생 이름표였다.
이도윤.
손끝이 차가워졌다. 셔츠를 든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나는 그것을 떨어뜨릴 뻔했다가 다시 꽉 움켜쥐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저 이름이 지워질 것처럼.
나는 침대 위 남자를 다시 돌아보았다. 이불 밖으로 나온 목덜미가 유난히 여렸다. 아직 각이 잡히지 않은, 부드러운 곡선이었다. 턱선도 아직 여물지 않은 듯 매끄러웠다. 술에 취해 흐릿했던 어젯밤 기억 속에서, 그가 웃을 때 보였던 덧니가 떠올랐다. 하얗고 작은 덧니였다. 그때는 그냥 귀엽다고만 생각했다. 저 나이 또래 애들 특유의 발랑 까진 매력이라고, 그렇게만 여겼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건 그냥 어려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어린 얼굴이었다. 아직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는 볼, 눈썹 밑에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솜털 같은 것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듯 몸을 낮췄다.
나는 방바닥에 떨어진 그의 가방을 발견했다. 검은색 백팩이었다. 브랜드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학생들이 흔히 메는 그런 가방이었다. 지퍼가 살짝 열려 있었고, 안에서 스프링 노트 귀퉁이가 삐죽 나와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노트를 꺼냈다.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표지에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삐뚤빼뚤한, 어딘가 성의 없는 필체였다.
2학년 3반 이도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노트를 떨어뜨렸다. 노트가 방바닥에 팔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2학년이라니. 고등학교 2학년이라니. 나는 스물넷이었다. 스물넷과 고등학생이라니,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가. 여섯 살, 아니 일곱 살 차이인가. 계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온갖 단어들이 뒤섞여 튀어 올랐다. 미성년자. 형법. 뉴스. 모자이크.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자꾸 얕아졌다. 어젯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도대체 무슨 짓을. 술을 얼마나 마셨던 거야, 왜 저 애랑 같이 있었던 거야, 저 애는 나를 어디서 만난 거야. 질문들이 답도 없이 계속 밀려들었다.
노트를 다시 집어 넣어야 하나, 그냥 두어야 하나.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마치 노트를 원래 자리에 넣어두면 이 상황이 지워질 것처럼. 손이 노트 위에서 허공을 맴돌았다.
그 순간 침대에서 이불이 스륵 걷혔다. 나는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가 눈을 뜨고 있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반쯤 감긴 눈꺼풀 사이로 나를 바라보다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웃음에 어젯밤 보았던 덧니가 다시 드러났다.
누나, 뭐 해요.
그 한마디에 나는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걸 느꼈다. 누나. 저 애가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아무런 죄책감도, 당황함도 없이, 그저 아침 인사처럼 태연하게. 나는 그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노트에 적힌 이름도, 교복 바지도, 저 이름표도, 전부 진짜였다. 그리고 저 애의 저 태연한 웃음이야말로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