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문서현의 문자를 계속 떠올리며 하루를 보냈다.
〈내일 옥상으로 좀 나와줄 수 있어? 할 말이 있어서.〉
그 짧은 문장 하나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수업 시간에도 자꾸 시계를 흘겨보고, 쉬는 시간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힐끔거렸다.
1교시가 끝나고 나서도, 2교시가 끝나고 나서도.
그때마다 창밖으로 스치는 옥상의 회색 철문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할 말이 있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냥 별거 아닌 얘기일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점심시간, 문서현은 평소처럼 웃으며 다가왔다.
"오늘 옥상 시간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럼 방과 후에."
그 말을 남기고 문서현은 무리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식판을 든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오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
5교시가 끝나고 복도로 나오는데, 강태희가 교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교복 재킷을 어깨에 걸친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반갑게 다가갔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발이 무거웠다.
"끝나고 시간 있어?"
"어, 그게···."
"약속 있어?"
순간 나는 문서현 얘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조금···, 있어요."
"누구랑."
"그냥, 아는 애랑요."
강태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턱선이 미묘하게 굳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문서현이야."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소문 다 났어."
그 말투에서 뭔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복도를 지나가던 애들 몇이 힐끔거리며 우리 쪽을 봤다.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잠깐 얘기하는 거예요,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닌 게 뭔데."
강태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 애가 뭘 원하는지 알아?"
"그게 무슨···."
"됐어."
강태희는 갑자기 말을 끊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교복 셔츠 등판이 점점 멀어지는 걸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어제 창고에서 있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의 서로 붉어진 얼굴, 흔들리던 목소리.
〈미안, 나도 모르게···.〉
그 낮고 조심스럽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온도가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다.
남은 수업 시간 동안 나는 계속 창밖만 바라봤다.
칠판의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뭐라고 설명하는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엔 오직 강태희의 굳은 턱선과, 문서현의 문자 하나만 번갈아 떠올랐다.
-
방과 후,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유독 조용했다.
발소리가 텅 빈 계단에 울려서, 마치 누군가 뒤따라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철문을 밀고 나가자 찬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옷깃이 펄럭였다.
문서현은 이미 난간 앞에 서 있었다.
바람에 실린 교복 치맛자락이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왔네."
"네, 무슨 얘기예요?"
문서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뒤돌아섰다.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사실은···, 나 도윤이 너 좋아해."
그 말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는 순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낌이 좋았어. 편하고, 재밌고."
"저는···."
"바로 대답 안 해도 돼. 그냥 마음 알아줬으면 해서."
문서현은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저절로 뒷걸음질을 쳤다.
등이 옥상 난간에 닿았다.
차가운 철제 난간의 감촉이 등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옥상 철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
고개를 돌리자, 강태희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표정이 완전히 얼어 있었다.
"···선배?"
강태희는 아무 대답 없이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서늘했다.
바람이 강태희의 셔츠 자락을 흔들었지만, 강태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 발짝도.
문서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선배. 그냥 저희 얘기 좀 하고 있었어요."
"얘기."
강태희가 낮게 되물었다.
"네, 그냥···."
"들었어. 다."
문서현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다시 금방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럼 선배도 아시겠네요, 저 도윤이 좋아하는 거."
강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너무 강렬해서, 나는 숨쉬는 법을 잊을 뻔했다.
몇 초였는지, 몇 분이었는지 가늠이 안 됐다.
그 정적 속에서 옥상 위 바람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윤아."
"네···?"
"이리 와."
짧고 단호한 명령이었다.
나는 저절로 몸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발이 먼저 움직였고, 생각은 그 뒤를 따라갔다.
강태희의 손이 뻗어와 내 손목을 잡았다.
그 손의 온도가 생각보다 뜨거웠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손목을 파고드는 감각이 선명했다.
"저기, 선배, 잠깐만요···."
"조용히 해."
강태희는 나를 자기 쪽으로 잡아끌었다.
문서현이 뒤에서 뭐라고 말했지만, 그 소리는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철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강태희의 손은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계단 하나를 내려갈 때마다 손목을 쥔 손의 힘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선배, 손목 아파요···."
강태희는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 손을 살짝 풀었다.
하지만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미안."
그 사과가 너무 낮고 짧아서, 나는 순간 이 사람이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 새삼 느꼈다.
계단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강태희의 옆얼굴을 비췄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강태희는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너 진짜 몰라?"
"뭘요···."
"내가 왜 이러는지."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대답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혹시, 라는 단어 하나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강태희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됐어. 나중에 말할게."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갈 때쯤, 강태희의 손이 슬며시 내 손목에서 떨어졌다.
그 온기가 사라진 자리가 이상하게 허전했다.
교문 앞에서 강태희는 아무 인사도 없이 먼저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몇 번이나 손목을 내려다봤다.
붉게 남은 손자국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문서현이 보낸 새로운 문자를 받았다.
〈아까 놀랐지, 미안. 그런데 내 마음은 진심이야.〉
그 문자를 읽으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강태희의 손목을 잡던 그 뜨거운 손끝만 자꾸 떠올렸다.
휴대폰 화면을 끄고 나서도, 손목에 남은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는지.〉
그 질문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도대체, 강태희는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그리고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싶은 걸까, 두려운 걸까.
그 답을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