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손끝에서 번진 소유욕

1화

입학식 날 아침부터 운이 없었다. 알람을 못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창밖은 훤했고,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튀어 나갔다. 세수도 제대로 못 하고 교복을 걸치면서 버스 정류장까지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 버스는 이미 정류장을 떠나고 있었다. 멀어지는 버스 꽁무니를 보면서 나는 그냥 욕이 나왔다. 다음 버스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결국 걸었다. 가방끈이 어깨를 파고드는 느낌이 유난히 아팠고, 신발 뒤축이 자꾸 벗겨졌다. 교문이 보이자마자 다시 뛰었는데, 발이 뭔가에 걸려 앞으로 확 쏠렸다. 넘어질 뻔한 걸 겨우 손으로 짚어 막았다.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강당에는 이미 자리가 거의 다 차 있었다. 나는 맨 뒷줄 구석 자리에 겨우 몸을 끼워 넣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중학교 동창들은 다 다른 학교로 흩어졌고, 나는 그 흔한 단짝 하나 없이 고등학교에 던져진 셈이었다. 옆자리 애들은 벌써 서로 아는 사이인 듯 소곤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웃음소리 사이에서 혼자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식이 시작되고, 교장의 말이 이어지고, 나는 그 지루한 시간 동안 그냥 앞줄의 뒤통수들을 세고 있었다. 몇 명인지도 세다가 까먹었다. 그러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목덜미부터 시작된 그 느낌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고개를 들었다. 강당 옆 통로, 2학년 자리 쪽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은발이었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긴 은색 머리카락이 강당 조명 아래서 이상하게 빛났다. 귀에는 은색 피어싱이 여러 개 박혀 있었고, 교복 재킷은 단추를 절반쯤 풀어놓은 채였다. 셔츠 목깃도 삐뚜름하게 젖혀져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이라면 벌써 붙잡아 세웠을 차림이었는데, 아무도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지나가던 선생님 하나가 시선을 슬쩍 피하는 걸 나는 똑똑히 봤다. 그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순간 숨을 참았다.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내 옆이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선의 방향은 명확했다. 나였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기 시작했다. 식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인파 속으로 섞여 들었다. 사람들 틈에 섞이면 그 시선도 흩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신발장 앞에서 신발을 갈아 신을 때도, 그 은발의 사람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한 번은 일부러 걸음을 빨리했다. 그래도 거리는 똑같이 유지됐다. 결국 나는 걸음을 멈췄다. "저기요." 목소리가 떨렸다. "저한테 무슨 볼일 있으세요?" 그 사람은 대답 없이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구두에서 시작된 시선이 아니라, 얼굴에서 시작된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교복 셔츠, 손목, 그리고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그 눈빛에 나는 저절로 자세를 고쳐 서게 됐다. "1학년." 짧은 한마디였다. 질문인지 확인인지 구분이 안 됐다. "네, 1학년 3반 이도윤인데요···." 이름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왜인지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 사람은 피식 웃었다. 웃는 얼굴이 순간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방금까지 서늘하던 인상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이도윤." 내 이름을 그대로 따라 말했다. 발음이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그리고는 아무 설명도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뭐였지, 방금. 뒤에서 누군가 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니 신발장 앞에 서 있던 남학생 몇 명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야, 너 방금 강태희랑 얘기했어?" "강태희요?" "2학년 강태희. 몰라? 학교 최강." 옆에 있던 다른 애가 끼어들었다. "쟤 저번에 3학년 선배들도 그냥 지나가더라. 눈도 안 마주치고." "근데 왜 너한테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들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나는 그 이름을 그날 처음 들었다. 강태희. 발음해보니 이상하게 입에 붙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알게 된 걸 후회하게 될 거라는 걸, 그때는 짐작조차 못 했다. - 다음 날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등굣길에 신발장 앞을 지날 때마다 누군가 나를 힐끔거리며 수군댔다. "저 애 맞지, 강태희 선배가 찜한 애." "찜?" "몰라, 뭔가 있대. 어제 강당에서도 눈 안 뗐다더라." "소문에는 이름까지 물어봤다던데." 소문이라는 게 이렇게 빠르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실제로는 그냥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는데. 교실에 들어가서도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이상하게 따라붙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몇몇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짝꿍이 슬쩍 물었다. "너 강태희 선배랑 무슨 사이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런데 왜 다들 그렇게 말해?" "나도 몰라." 나도 그게 궁금했다. 1교시가 끝나고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교실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나는 또 그 은발머리를 봤다. 복도 끝, 창가에 기대서서 팔짱을 낀 채였다. 교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가 다시 넣는 손짓이 무심했다. 주변에 있던 다른 2학년 남학생들이 그 존재만으로도 눈치를 보며 슬쩍 자리를 비켰다. 누군가는 일부러 반대쪽 복도로 돌아가는 것까지 보였다. 나는 못 본 척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발이 저절로 멈췄다. "어디 가." 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어느새 강태희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다. "교실 가는데요···." "이름 뭐라 그랬지." "어제 말했잖아요. 이도윤인데요." "기억 안 나." 분명히 어제 그대로 따라 말했으면서, 지금은 아니라고 우기는 저 낯짝이 뭔가 이상했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강태희는 그 표정을 보고 웃었다. 짧은 웃음이었다. "그 표정 재밌네." "···네?" "됐고." 강태희는 손을 뻗어 내 어깨에 걸린 가방끈을 잡아 살짝 바로잡았다. 손끝이 어깨를 스치는 순간 나는 저절로 숨을 멈췄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반응할 틈도 없었다. "가방끈 이렇게 매고 다니면 목 아파." 그 말투가 너무 담담해서, 나는 잠깐 이 사람이 나한테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지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다. "저기, 선배···." "타." "네?" "교실 가는 거 아니었어." 강태희는 이미 등을 돌려 앞서 걷고 있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이상하게 눈에 박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결국 뒤따라 걸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설명이 안 된다. 그냥,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복도를 걷는 내내 뒤통수가 따가웠다. 지나가던 애들이 다들 나와 강태희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쟤 진짜 뭐야." 나도 그게 궁금했다. - 그날 오후, 교무실 앞에서 나는 담임을 마주쳤다. "이도윤, 너 강태희 선배랑 알아?" "···아뇨, 잘 몰라요." "그런데 왜 걔가 너 반 물어봤어." 담임의 얼굴에는 걱정과 흥미가 반쯤 섞여 있었다. 목소리를 낮추며 다시 물었다. "조심해. 걔가 좀··· 유명해서." "유명하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담임은 대답 대신 그냥 어깨를 두드려주고 지나갔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숙였다. 집으로 가는 길, 나는 계속 그 순간을 곱씹었다. 어깨에 닿았던 손끝의 느낌이 이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냥 가방끈을 고쳐준 거였는데, 그게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서도 그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집에 도착해서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그 은발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천장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는 걸 몇 번이나 반복했다. 도대체, 강태희는 왜 나를 이렇게 보는 걸까. 그냥 관심이 많은 사람인 걸까, 아니면 정말로 나한테 뭔가 볼일이 있는 걸까. 대답 없는 질문만 머릿속을 맴돌았고, 나는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교문 앞에 강태희가 서 있는 걸 보고서야 나는 이게 하루짜리 관심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은발이 아침 햇살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춘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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