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고에 남자는 나 하나뿐

5화

집에 돌아왔을 때, 현관 앞에서 엄마가 서 있었다. 신발을 벗기도 전에 알았다. 뭔가 잘못됐다. 지영 엄마의 얼굴이 유난히 굳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왔어?" 하고 부엌에서 소리치던 사람이 현관까지 나와 서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엄마, 왜 그래?" "학교에서 전화 왔었어." "전화요?" 손끝이 차가워졌다. 가방을 내려놓는 손이 괜히 느려졌다. 별일 아닐 거야. 별일 아닐 거야. 속으로 그렇게 되뇌는데, 정작 심장은 벌써부터 쿵쿵 뛰고 있었다. "이사장이 직접 방문한다고." "언제요?" "내일." 숨이 턱 막혔다. 내일이라니. 예고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왜 갑자기..." "체육 시간에 너무 눈에 띄었대." 체육 시간.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운동장 한가운데서, 다들 나를 쳐다보던 그 눈빛들. 그게 결국 여기까지 이어진 건가. 엄마가 소파에 앉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그랬잖아. 초식동물을 육식동물 우리에 넣는 거라고." "엄마..." "미안해. 이런 말 또 하고 싶지 않은데." 엄마 목소리에 오래된 피로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 피로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었다. - "혼자서도 잘 키울 거야." 엄마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빠 없이 삼남매를 키우면서 얼마나 많은 걸 혼자 견뎌왔는지, 나는 다 알지 못했다. 그냥 짐작만 할 뿐이었다. 밤늦게 들어와 소리 없이 씻고, 새벽에 다시 나가던 뒷모습들. 그게 다 무언가를 견디는 과정이었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엄마, 나 학교 계속 다니고 싶어." "알아. 그런데..." 엄마가 말을 멈췄다. 손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몇 번 꾹꾹 눌렀다. 뭔가 말하려다 삼키는 사람의 버릇이었다. "이사장이 누군지 알아? 예전에 학교 다닐 때 나 힘들게 했던 그 교감선생님, 지금 이사장 됐대." "그게 무슨..." 엄마의 과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거였다. 살아오는 동안, 엄마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도 이 동네에서 학교 다녔거든. 그때 그 사람이 나를... 아니, 됐다. 지난 일이야." 엄마가 손을 내저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엄마." "괜찮아. 그냥 걱정돼서 그래." 괜찮다는 말과 떨리는 손이 너무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더 캐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앉았다.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그냥 멍하니 벽을 봤다. 이사장. 내일. 체육 시간.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부딪치고 흩어졌다. 서린 누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늘 그렇듯. "들었어?" "응." "이사장이 온다는 거?" "엄마 얘기도." 서린 누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어디까지 들었는데?" "교감선생님이었다는 거, 엄마 힘들게 했다는 거. 그 정도." 서린 누나가 침대 끝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살짝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그 얘기 잘 안 해. 우리도 자세히 몰라." "진짜? 누나도?" "응. 예전에 큰오빠한테 살짝 물어봤는데, 큰오빠도 잘 모른대. 엄마가 그 얘기만 나오면 화제를 딱 돌려버리거든." "근데 왜 지금..." "모르지. 근데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서린 누나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너 내일 눈에 띄는 짓 하지 마. 그냥 조용히 있어." "내가 뭘 어쨌다고..." "체육 시간에 너무 잘했다며. 그게 문제라잖아." 억울했다. 잘하는 게 문제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근데 지금 상황에선 그 억울함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서린 누나가 나가고, 방 안에 혼자 남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하은이었다. [내일 이사장 방문한대요. 우리 반에 올 수도 있어요.] 손가락이 떨렸다. 답장을 쓰려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이 얘기가 벌써 반 전체에 퍼진 건가. 학교라는 곳은 정보가 도는 속도가 이상하게 빨랐다. [걱정 말고 자요. 저희가 있어요.] 하은의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짧은 문장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놓였다. 저희가 있어요. 그 말이 왜 이렇게 든든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딸랑, 알림음이 한 번 더 울렸다. [내일 다들 계획 있으니까.] 계획이라니. 무슨 계획인지 물어보려던 순간, 창밖에서 벚꽃 냄새 같은 게 스쳐 지나갔다. 실제로 벚꽃이 있을 계절도 아닌데, 왜 그런 냄새가 났는지 모르겠다. 착각이겠지. 근데 이상하게 그 냄새가 몸에 익은 것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맡아본 적 있는 것처럼. 답장을 쓰려다 지우고, 다시 쓰려다 지웠다. 결국 보낸 건 짧은 한 마디였다. [네. 고마워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손이 조금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뭐가 이렇게까지 떨리는 건지.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방 안이 조용해지자 낮에 있었던 일들이 다시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체육 선생님의 놀란 얼굴, 반 아이들의 시선, 그리고 엄마의 굳은 얼굴까지. 엄마의 굳은 얼굴이 계속 눈앞에 남았다. 그 표정을 보면서 알았다. 엄마가 두려워하는 건 내가 학교에서 눈총 받는 것 정도가 아니라는 것. 그보다 훨씬 오래된, 훨씬 깊은 무언가가 다시 건드려지고 있다는 것. 내일, 학교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런 확신도 들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사장이라는 사람이, 엄마의 오래된 상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상처가 내일, 나를 향해 다시 걸어오고 있다는 것.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자꾸 엄마의 떨리던 손끝이 떠올랐다. 그리고 하은이 보낸 마지막 문장, 계획이 있다는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무슨 계획일까. 그게 나를 도와주려는 건지, 아니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건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창밖은 여전히 캄캄했고, 벚꽃 냄새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그 냄새가 남긴 이상한 예감만은, 밤새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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