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고에 남자는 나 하나뿐

3화

"그러니까 걸음이 그게 아니라니까!" 서린 누나가 짜증을 냈다. 화장대 앞에서 나는 다리를 움직여 봤다. "이렇게?" "아니, 그건 로봇이잖아." 서아 누나가 옆에서 킥킥거렸다. "도윤아, 무릎을 너무 붙이지 마. 그냥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가 뭔데." 반박하듯 물었다. 두 누나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집에 돌아온 지 세 시간째, 우리는 여전히 걸음걸이 특훈 중이었다. 거실 카펫 위에 테이프로 선을 그어놓고 그 위를 왔다 갔다 하는 게 벌써 삼십 분째였다. 발바닥이 아팠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다시. 무게중심을 살짝 뒤로." 서린 누나가 손짓으로 지시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걸었다. 아니 걸으려고 했다. 발끝이 꼬였다. "으악!" 넘어질 뻔한 걸 겨우 붙잡았다. 서아 누나가 배를 잡고 웃었다. "진짜 못 봐주겠다..." "누나가 해봐, 그럼!" "내가 왜 해. 넌 여자애 걸음 배우는 사람이잖아." 억울했다. 근데 반박할 말이 없었다. "목소리도 문제야." 서린 누나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긴장하면 원래 톤으로 돌아가더라고. 아까 통화할 때도 그랬어." "어쩔 수 없잖아!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런 일?" 서아 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담임도, 반 애들도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것. 처음부터 다. "뭐?!" 두 누나가 동시에 소리쳤다. 거실 벽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럼 다 헛수고였잖아!" 서린 누나가 머리를 짚었다. 우리가 며칠 밤을 새워 화장법과 걸음걸이를 연습한 게 다 소용없었다는 뜻이었다. 새벽 두 시까지 아이라인 그리는 법을 배우던 기억이 순식간에 허무해졌다. "아니 근데 어떻게 알았대? 뭐 특별히 실수한 거 있어?" "몰라. 그냥 처음부터 알고 있었대." "그게 더 무섭잖아!" 서아 누나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 노력은 뭐가 되는 거야..." "그래도 밖에서는 몰라야 하잖아." 내가 겨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맞아, 학교 밖에서 들키면 진짜 큰일이야." 서아 누나가 순식간에 정색하며 손을 꼭 잡았다. "도윤아, 순결 지켜야 해. 알지?" "누나,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몰라, 그냥 걱정돼서." 서아 누나가 눈을 반짝였다. 진짜로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뭘 걱정하는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매일 연락해. 별일 없어도 사진 한 장씩 보내고." "내가 무슨 실종 위기 청소년이야?" "몰라, 그냥 그렇게 해." 결국 하겠다고 대충 답했다. 서아 누나가 만족한 얼굴로 새끼손가락을 걸어왔다.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시켰다. "근데 그 반 애들, 왜 지켜준다는 거야?" 서린 누나가 물었다. 팔짱을 낀 채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랐다. 소율이가 왜 그렇게 팔을 벌리고 나섰는지, 지우가 왜 반찬을 나눠주는지, 하은이가 왜 그렇게 담담하게 규칙을 나열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은폐 작전이라나." "은폐 작전?" 두 누나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손바닥까지 마주치면서. "귀엽네." "누나들이 더 귀엽거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안심이 됐다. 적어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 다음날 학교. 급식실로 향하는 길에 소율이 팔짱을 껴왔다. 팔뚝에 닿는 온기가 어색해서 나는 슬쩍 몸을 뺐다가 다시 붙잡혔다. "도현아, 우리 규칙 하나 정했어!" "규칙?" "과도한 접근 금지!" 소율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표정이 진지했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구분이 안 됐다. "누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내가 막을게." "그게 왜 규칙이 필요한데..." "애들이 다 너 궁금해하거든. 남자애가 여기 있다는 게 신기하잖아!" 급식실에 들어서니 정말로 다른 반 애들 몇몇이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시선이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소율이 팔을 벌려 앞을 가로막았다. "쟤 배 아파! 지금 컨디션 안 좋아! 다들 비켜줘!"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애들이 순순히 물러났다. 저게 통한다고? "고마워..." "이게 은폐 작전 1번 규칙이야. 접근 차단." 하은이 뒤따라오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트레이를 든 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2번은 시선 분산. 3번은 대화 유도로 자연스럽게 넘기기." "진짜 체계적이시네요..." "당연하지. 우리 반 자존심이야." 소율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존심이라는 단어가 왜 여기서 나오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배식대 앞에서 줄을 서는데 뒤에서 누가 소리쳤다. "저기 남자애 아니야?"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소율이 즉각 몸을 돌려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얘 원래 목소리가 좀 낮아! 유전이래!" 전혀 설득력 없는 말이었는데 상대방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갔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지우가 조용히 트레이를 들고 다가왔다. 발걸음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도현이, 이거 먹어봐." 반찬 하나를 슬쩍 내 트레이에 옮겨놨다. 정갈하게 담긴 나물이었다. "이거 뭔데요?" "내가 어제 집에서 만든 건데." "급식에 개인 반찬을 가져와요?" "응. 안 되나?" 지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어딘가 대답을 거부하기 힘든 압박감이 있었다. 안 된다고 하면 오히려 내가 잘못한 사람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먹어봤다. 짜지 않고 딱 적당했다. 간이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딱 좋은 균형이었다. "맛있어요." "다행이다." 지우가 웃었다.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옆에서 소율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 쳤다. "봐, 이게 은폐 작전 4번, 우호 세력 확보야." "그런 규칙은 언제 또 만든 거야..." "방금." "방금?" "응, 방금 만들었어." 하은이 무표정하게 젓가락으로 밥을 뜨며 한마디 덧붙였다. "규칙은 상황 따라 즉석에서 추가돼. 그게 우리 작전의 강점이야." 강점인지 허점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트레이를 들고 자리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이 작전이라는 게, 대체 언제까지 통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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