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고에 남자는 나 하나뿐

2화

쉬는 시간이었다. 교실 안은 여느 때처럼 소란스러웠다. 누군가는 매점에서 사 온 아이스크림을 까먹고 있었고, 누군가는 휴대폰으로 아이돌 영상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소음 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튀지 않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어제도 오늘의 목표였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때 하은이 다가왔다. 발소리부터 남달랐다. 조용하고, 규칙적이고, 어딘가 결심한 듯한 걸음. 나는 본능적으로 등을 곧게 세웠다. 하은이 내 옆에 앉았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할 말 있어요." 말투가 단정했다. 나는 괜히 침을 삼켰다. "네?" "선생님이 아침에 서류 갖고 계셨죠." 서류라니. 무슨 서류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아침의 장면을 빠르게 되짚었다. 오현주 선생님이 클리어파일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왔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입학 서류요. 거기 다 나와 있어요." 하은의 눈빛이 담담했다.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뭐가... 나와 있다는 거예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럴 때만 골든타임처럼 원래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서아 누나가 알려준 톤은 어디로 증발했는지 모르겠다. "성별." 한 글자가 폭탄처럼 떨어졌다. "...!" 말이 안 나왔다.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손가락을 꾹 눌러봤지만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선생님도 알아요. 우리 반도 다 알아요." "다... 다요?" 뒷목이 서늘해졌다. 교실을 둘러봤다. 몇몇 애들이 나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슬쩍 피했다. 어색한 웃음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누군가는 급하게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반응들, 저 미묘한 시선들. 이게 다 계산된 침묵이었다는 뜻이다. "어떻게..."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몇 주 동안 쌓아온 벽돌 같은 위장이 한 번에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귓속에서 들렸다. "교육청에서 미리 공문이 왔대요. 특별 관리 대상이라고." 특별 관리 대상. 그 단어가 내 귀를 때렸다. 병원 진료 카드에나 붙을 것 같은 명칭이 내 이름 옆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서글펐다. "근데 왜, 왜 다들 아무 말도..." "지켜주려고요." 하은이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지켜준다는 말이 이렇게 무겁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지켜준다는 게..." "도현 씨, 아니 도윤 씨." 본명이 나오는 순간 숨이 멎었다. 교실 한복판에서, 아무렇지 않게, 마치 날씨 얘기하듯. "본명도 알아요?" "서류에요." 하은이 짧게 웃었다. 웃음소리마저 정갈했다.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게 위장 입학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다 들통난 벌거벗은 입학인가. 차라리 후자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투명 인간이 되고 싶었다. 소율이 다가와 끼어들었다. 발랄한 걸음걸이로, 마치 방금 응원단에서 뛰쳐나온 사람처럼. "야,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다 커버해줄게!" "커버...요?" "응! 은폐 작전!" 소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빛이 이상하게 반짝였다. 은폐 작전이라니, 뭔가 유치원생들 놀이 같은 이름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조금 따뜻해졌다. "작전명이... 있어요?" "당연하지! 코드네임 도라에몽!" "...왜 도라에몽이에요?" "주머니에서 뭐든 나오잖아!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어줄게!" 무슨 논리인지 이해는 안 됐지만 굳이 따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반박할 힘도 없었다. 뒤쪽 자리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도현이 지켜주자." 하프업으로 머리를 정리한 애였다. 온화한 인상이었다. 목소리 톤이 다정했는데, 눈빛은 어딘가 계산적인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때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배지우예요."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 손끝으로 앞머리를 살짝 넘기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 연습한 것처럼. "저...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목소리마저 어색했다. 이 상황에서 감사가 맞는 말인지도 헷갈렸다. 담임 오현주가 다시 교실로 들어왔다.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 손짓이 어찌나 태연한지, 방금 내 인생이 무너진 걸 아는 사람 같지 않았다. "도현이, 잠깐 교무실로 올래?"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잊어버렸다. 서린 누나가 알려준 걸음법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증발했다. 보폭을 작게, 무릎을 붙이고, 발끝을 안쪽으로. 그 순서가 뒤엉켜서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뒤뚱뒤뚱. 몇몇 애들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킥킥, 하는 짧은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따라붙었다. "괜찮아요?" 하은이 낮게 물었다. "네... 네에." 목소리가 또 갈라졌다. 서아 누나가 가르쳐준 톤이었는데, 긴장하면 자꾸 원래 목소리로 돌아갔다. 이러다 정체가 두 번 세 번 들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교무실로 가는 복도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셨고, 나는 그 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걸었다. 마치 재판장에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교무실에서 오현주 선생님이 서류철을 펼쳤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놀랐지?" "많이요..."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근데 우리도 위에서 지시받은 거라." 선생님이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미안한 기색이 진짜인지 형식적인 사과인지 구분이 안 됐다. "교육청에서 특별 관리하라고 했어. 남학생 하나가 지원했으니까." "제가... 그렇게 특별한 경우인가요?" "응. 요즘 세상에 남자가 몇이나 있니."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 고생을 하는 거였다. 특별하다는 말이 이렇게 부담스러울 줄은 몰랐다. "그럼 저...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별거 없어. 그냥 평소처럼 학교 다니면 돼. 애들도 다 지켜주기로 했으니까." "애들이... 왜요?" 선생님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웃었다. "그건 나도 몰라. 근데 다들 너 되게 좋아하나 보더라." 그 말에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좋아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지금 이 상황에서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연락처 교환할까? 응급용으로." 선생님이 휴대폰을 꺼냈다. 나는 얼떨결에 번호를 눌렀다. 손가락이 어색하게 화면 위를 헤맸다. 생각보다 꽤 귀엽네. 선생님이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는 걸 나는 그때 알 수 없었다. 그냥 선생님이 웃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자, 다 됐다. 이제 들어가." "네... 감사합니다." 교무실을 나오면서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폭풍은 지나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몸은 더 무거워졌다. 교실로 돌아오는 길, 복도에서 걸음이 또 삐뚤어졌다. 서린 누나, 이거 진짜 잘못 가르쳐준 거 아니야. 속으로 원망하며 걸었다. 복도 끝에 서 있던 배지우가 나를 힐끗 보더니,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이 왜인지 마음에 걸렸다. 지켜준다는 말과, 계산적인 눈빛과, 방금 그 웃음이 자꾸 겹쳐져서. 교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소율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자자, 다들 집합! 도라에몽 작전 회의 시작한다!"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잠시 멈춰 섰다. 이게 지켜주는 건지, 더 큰 사건의 시작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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