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고에 남자는 나 하나뿐

1화

정문 앞에서 나는 세 번째로 치맛자락을 다시 폈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체크무늬 교복 치마였다. 서린 누나가 골라준 거였다. 짧으면 위험하고 길면 이상해 보인다고, 딱 그 중간을 찾느라 셋이서 밤을 새웠다. 매장을 세 군데나 돌았다. 마지막 집에서 점원이 "손님 다리가 예쁘시네요" 했을 때 나는 진지하게 죽고 싶었다. "한도윤, 정신 차려." 혼자 중얼거렸다. 이름 대신 쓸 이름도 따로 있었다. 한도현. 서류에는 그렇게 올라가 있었다. 성별란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서류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은 분명 내 인생을 망칠 작정으로 태어난 게 틀림없다. 손끝이 차가웠다. 한강여자고등학교. 정문 위에 붙은 글자가 아침 햇빛에 반짝였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나는 삼 년 동안 여자가 되어야 했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사진을 찍고, 심지어 스토커까지 붙는 세상에서, 나는 그냥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잘못된 꿈인가. 아니야, 아니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평범하게 산다는 게 이렇게까지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었나. 등에 멘 가방끈을 다시 고쳐 멨다. 안에는 생리대까지 챙겨 넣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걸 준비한 서린 누나의 표정을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교문을 넘었다. 발밑에서 자갈 밟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다른 애들은 다 자연스럽게 걷는데 나는 걸음마다 무릎을 어디로 둬야 할지 고민했다. 치마 안으로 바람이 훅 들어올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신발이 사물함 앞에서 걸렸다. 아니, 걸린 게 아니라 치마 끝단이 사물함 손잡이에 걸렸다.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쿵. 넘어지기 직전, 누군가 팔을 붙잡았다. "조심해요."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었다. 흑발이 어깨 아래로 곧게 떨어져 있었다. 눈매가 서늘했는데 이상하게 차갑지가 않았다. 붙잡힌 팔뚝에서 그 애의 손 온도가 그대로 느껴졌다. 차가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서린 누나가 가르쳐준 톤보다 한 톤 낮게 나왔다. 아, 망했다. 첫날부터. 이거 들켰나. 아니야, 아니겠지. 목소리 톤 하나로 뭘 알겠어. "3반이죠?" 그 애가 내 명찰을 슬쩍 보고 물었다. 한도현. 명찰에 적힌 이름을 나는 애써 태연하게 내려다봤다. 이름표를 볼 때마다 남의 이름을 훔쳐 단 기분이 들었다. "네, 네." "저도 3반이에요. 유하은." 하은이라는 애가 짧게 웃었다. 웃는 게 예의상인지 진심인지 구분이 안 됐다. 입꼬리는 올라가는데 눈은 별로 웃지 않았다. 그냥 심장이 쿵쿵거렸다. 낯선 사람이 처음으로 나를 붙잡아준 순간이라 그랬을 거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없어야 했다. 잡혔던 팔이 아직도 따뜻했다. 아니, 방금 차갑다고 했잖아. 뭐가 맞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같이 복도를 걸었다. 하은은 말이 없었다. 나도 말을 걸 자신이 없었다. 그냥 옆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졌다. 이러다 첫날에 심장마비로 죽는 거 아닌가 진지하게 걱정했다. 교실 문 앞에 섰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 문을 열면 진짜 시작이다. 삼 년. 삼 년 동안 이 문을 몇 번이나 열게 될까. 손잡이를 잡았다. 손끝이 미끄러웠다. 땀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모르겠다. 옆에 선 하은이 나를 한번 쳐다봤다. 뭔가 재밌는 걸 구경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딸깍. 문이 열렸다. 스물다섯 명 정도 되는 여학생들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손은 어디에 둬야 하는지 다 잊어버렸다. 걸음이 로봇처럼 어색했다. "안녕...하세요. 한도현입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티가 안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마 났을 거다. 박수가 나왔다. 예상 밖이었다. 몇몇은 손을 흔들었고, 누군가는 "우와"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심지어 맨 뒷줄 애 하나는 휴대폰을 슬쩍 들었다가 옆자리 애한테 팔을 맞고 도로 내려놓았다. 뭐지. 환영받는 건 좋은데, 이 정도로 반가워할 일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했다. 전학생이 이렇게 인기 있는 학교였나. 아니면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건가. 자리를 안내받으며 창가 쪽 두 번째 줄에 앉았다. 옆자리에 갈색 머리를 옆으로 정리한 애가 앉아 있었다. "난 정소율! 반가워!" 인사가 우렁찼다. 목소리 톤이 밝아서 반사적으로 웃음이 났다. 이 반에 저런 애 한 명씩은 꼭 있구나 싶었다. "한도현이에요." "알아, 알아." 뭘 안다는 건지 순간 이해가 안 됐다. 그냥 웃고 넘겼다. 알긴 뭘 안다는 거지. 나는 방금 이 교실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인데. "저기, 근데..." 내가 뭔가 물으려는 순간 소율이가 먼저 끼어들었다. "수학 필기 잘 하는 편이야? 나 다음 시간에 노트 좀 빌려도 돼?" "아, 네, 그럼요." 대답하면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방금 그 박수 소리가 맴돌았다. 뭐였을까. 그냥 새 얼굴이라 반가운 거겠지, 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오현주라고 소개했다. 아직 대학을 갓 졸업한 것처럼 앳된 얼굴이었는데 눈빛만은 묘하게 여유가 있었다. 교탁 위에 손을 짚는 자세부터 뭔가 능글맞아 보였다. "자, 오늘부터 우리 반이 된 한도현 학생." 선생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부드러운 미소였다. "잘 부탁드려요." 고개를 숙였다. 조용히 안도했다. 첫날이 이렇게 순조롭게 넘어가는구나, 하고. 손끝을 꾹 눌러 긴장을 눌러 삼켰다. 그때 선생님이 덧붙였다. "조심히 다니고. 특히..." 말을 멈췄다. 교실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몇 명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는 게 느껴졌다. 나만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특히?" 내가 되물었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선생님이 웃으며 넘겼다. 하지만 나는 그 웃음에서 뭔가를 읽어냈다. 확신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를. 웃음 뒤에 뭔가를 숨긴 사람의 표정이었다. 뭘 숨기는 건데요, 선생님.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전학 첫날부터 담임한테 따지듯 묻는 애로 찍히고 싶지 않았다. 하은이 나를 슬쩍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아까 복도에서 봤던 그 미소, 예의상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되던 그 표정이 또 나왔다. 뭐야, 저 표정은.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나쁜 예감이었다. 소율이는 여전히 밝게 웃으며 내 옆에서 필통을 뒤적이고 있었고, 교실 안 공기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했다. 그런데 왜 나만, 이 안에서 뭔가 잘못 끼워진 조각이 된 기분이 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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