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나는,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은 이상하게 조용한 날들이 이어졌다. 다인은 여전히 아침마다 골목 끝에서 나를 기다렸고, 팔을 걸어오는 습관도 그대로였으며, 조별 과제도 무사히 발표를 마쳤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는데, 그 애가 던진 잠꼬대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가슴 어딘가에 얹혀 있었지만, 나는 그걸 다시 꺼내 묻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은 채로 두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으니까. 물어보는 순간, 그 말이 진짜였는지 아니었는지가 확정되어 버릴 테고, 나는 그 확정된 사실을 견딜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다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그 애의 목덜미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한 올까지 눈에 들어와서, 나는 몇 번이나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창밖에는 이미 늦가을의 햇살이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고, 운동장 가로수의 잎들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풍경이 꼭 지금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붙잡고 싶은데 붙잡을 수 없는, 그런 것들.
토요일 오후, 다인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다인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환했고, 그 웃음 하나에 내 심장이 또 반응한다는 사실이 한심했다. 엄마는 다인을 보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부엌에서 과일을 깎아 내왔다.
"다인이 왔구나. 요즘 둘이 붙어다니는 걸 보면 엄마는 흐뭇하다니까." 엄마가 다인의 앞에 과일 접시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어머니 손 맛이 최고예요." 다인이 사과 한 조각을 집어 먹으며 활짝 웃었다.
엄마는 그런 다인을 볼 때마다 진짜 딸처럼 대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다인을 이렇게 편하게 받아주는 이유가 우리가 그저 오래된 소꿉친구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 나의 진짜 마음을 눈치챈다면 그 눈빛이 지금처럼 따뜻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스스로가 참 못났다고 여겼다.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내 감정을 들켰을 때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었으니까.
"둘이 이심전심이잖아. 서연이가 말 안 해도 다인이가 다 알아채고, 다인이가 힘들 때는 서연이가 먼저 눈치채고." 엄마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을 때, 나는 애매하게 따라 웃었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그저 감정 이해의 문제라면, 나는 정말로 이심전심이었다. 다인이 배고픈지, 힘든지, 기분이 안 좋은지를 나는 누구보다 빨리 알아챘다. 눈빛 하나, 걸음걸이의 속도 하나만으로도 그 애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마음 전체를 뜻하는 거라면, 나는 그 말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다인은 내 진짜 마음을 조금도 알지 못했으니까. 그 간극이 너무 커서, 가끔은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방에 들어가 다인이 내 책상 위에 놓인 실뜨개 재료를 발견했다.
"또 뭐 만들어?" 다인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장갑 만들다가 실패해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저번에 준 거 아직도 잘 끼고 있는데." 다인이 웃으며 자기 가방을 뒤져 정말로 그 실패작 장갑을 꺼내 보였다. 삐뚤빼뚤한 코가 그대로 남아 있는, 누가 봐도 서툰 솜씨의 결과물이었는데, 그걸 다인은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았다. 겨울도 아닌데 왜 가방에 넣어 다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보면 뭔가 무너질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 웃음 뒤에 숨긴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다인은 짐작이나 할까.
"이번엔 색깔 뭐로 할 거야?" 다인이 실뭉치를 뒤적이며 물었다.
"글쎄, 파란색이나 회색쯤." 나는 실뭉치 하나를 집어 들며 대답했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다인이 눈치채지 않았으면 했다.
"서연아, 나 그거 알아?" 다인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뭐?" 나는 심장이 덜컥했다.
"너 요즘 좀 이상해. 뭔가 나한테 숨기는 거 있는 거 같아." 다인의 시선이 나를 정확히 향하고 있었다.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나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치는 소리가 다인에게까지 들릴 것 같아서, 나는 애써 실뜨개 재료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숨기는 거 없어." 나는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는 걸 나 자신도 느꼈다.
"진짜?" 다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 눈빛에는 장난기와 진지함이 반쯤씩 섞여 있어서, 나는 그게 더 무서웠다. 장난으로 넘어가 주면 좋을 텐데, 혹시 정말로 뭔가를 알아챈 거라면.
"진짜야. 뭘 그렇게 의심해." 나는 애써 목소리에 웃음을 섞어 넣으며 대답했다.
다인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다시 실뜨개 재료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뭐 언젠가는 말해주겠지." 다인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는데, 그 웃음이 나에게는 안심보다는 더 큰 불안으로 다가왔다. 웃음 뒤에 숨겨진 의미를 헤집어보려 해도, 나는 그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다인이 뭔가를 눈치채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말일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그날 밤을 보냈다. 이불 속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며, 다인의 그 말투와 표정을 곱씹었는데, 곱씹을수록 답은 더 멀어져만 갔다.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 교실 문이 열리며 낯선 얼굴이 담임선생님을 따라 들어왔다.
"오늘부터 우리 반에 합류하게 된 전학생이에요. 인사해요."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학생이었는데, 교실 안 여기저기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여자애들 몇몇은 벌써부터 소곤거리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고, 그 애는 그런 시선들이 익숙한 듯 능숙하게 웃어 보이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 애가 자기소개를 마치고 자리를 찾아 앉는 순간, 다인이 옆에서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 애 좀 잘생겼다, 그렇지?"
그 한마디가 왜 이렇게까지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는지, 나는 그 순간까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인의 시선이 그 애의 뒷모습을 잠시 따라가는 걸 보면서, 나는 그저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 속으로는 무언가가 조용히 갈라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