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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강도훈 시점] 소이의 시험 점수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나는 반 아이들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78점? 소이 진짜 이상하다, 원래 이런 애 아니었잖아."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나는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사실이었다. 소이는 원래 이런 성적을 받는 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십 년 넘게 소이의 시험 범위를 정리해줬고, 소이는 그걸 바탕으로 성실하게 공부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잘 맞는 톱니바퀴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 톱니바퀴가 빠지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그것이 정말 톱니바퀴였는지, 아니면 내가 소이를 붙잡아두는 사슬이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교실 뒷자리에서 그 대화를 엿듣는 동안, 나는 손에 쥔 펜을 필요 이상으로 세게 눌렀다. 펜촉이 종이를 뚫을 것 같았다. 소이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니라는 말. 그 말을 하는 아이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더 이상 소이의 시험 범위를 정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위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이의 성적이 떨어진 게 내 탓 같아서가 아니라, 소이가 나 없이는 78점밖에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딘가 뒤틀린 방식으로 나를 안심시켰다는 게 무서웠다.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이 소름 끼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자꾸 떠올렸다. 소이가 준비물을 잊고 울먹이던 날, 내가 뛰어가서 대신 사다 주었던 그날. 그날 소이는 교실 앞에서 울고 있었고,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의 준비물을 검사하며 소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구점까지 뛰어갔다. 다섯 블록을 뛰어서, 숨이 턱에 차서, 만들기 재료를 사서 다시 뛰어왔다. 소이는 내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눈이 커졌고, 그다음엔 울음을 그치고 나를 향해 웃었다. 나는 그때 뭔가 뿌듯함을 느꼈다. 소이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그때는 좋았다. 그런데 그 뿌듯함이,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 다른 색깔로 보였다. 나는 소이가 나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은근히 만들어왔던 건 아닐까. 소이가 뭔가를 놓치기 전에 내가 먼저 챙겨줌으로써, 소이가 스스로 뭔가를 해낼 기회를 계속 빼앗아왔던 건 아닐까. 그 생각이 한 번 들자, 멈추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소이가 처음으로 반장 선거에 나가겠다고 했던 날도 떠올랐다. 나는 그때 소이의 연설문을 밤새 대신 써주었다. 소이는 그 연설문을 그대로 외워 발표했고, 반장이 되었다. 아이들은 소이가 참 똑똑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묘한 뿌듯함과 동시에 씁쓸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그 씁쓸함의 이유를 몰랐다. 지금은 알 것 같았다. 그건 소이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었으니까. 중학교 2학년 때, 소이가 처음으로 다른 친구와 함께 준비물을 사러 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은근히 불안해했던 기억이 났다. 그 친구가 소이를 제대로 챙겨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나는 그날 결국 소이보다 먼저 문구점에 가서 필요한 걸 다 사놓았고, 소이가 문구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살 게 없었다. 소이는 그때 웃으며 고맙다고 했지만, 그 친구는 어딘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 친구의 이름도 잊었다. 소이와 그 친구가 그 뒤로 가까워지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한다. 우연이었을까. 나는 그때 그것을 우연이라고 믿었다. 그게 배려였을까, 아니면 내가 소이의 세계에서 다른 사람이 들어올 자리를 미리 없애버린 걸까. 나는 그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그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지만, 책을 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고,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 지난 십 년을 되짚었다. 소이의 첫 자전거를 잡아준 것도 나였고, 소이가 좋아하던 선생님이 전근 갔을 때 옆에서 위로해준 것도 나였고, 소이가 첫 이별을 겪었을 때 밤새 통화를 해준 것도 나였다. 그 모든 순간마다 나는 소이의 옆에 있었다. 소이의 세계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굳건히 자리 잡을 틈이, 정말 있었던 걸까. 교실에서 나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소이가 아침에 인사를 건네도, 나는 짧은 대답만 했다. 소이의 얼굴에 스치는 당황과 서운함을 나는 못 본 척했다. 그게 잔인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면, 다시 예전처럼 소이의 모든 것을 챙기려 들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또 다른 형태의 제어라면, 나는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번은 소이가 쉬는 시간에 내 자리로 다가와 뭔가 말을 꺼내려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교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면서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도망친 거였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소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알고 싶지 않았던 건지, 알게 되면 다시 그 손을 잡을까 두려웠던 건지, 나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강도훈, 너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해?" 나라연이 어느 날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손에 든 휴대폰으로 창밖 풍경을 찍으며, 시선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냥." 나는 대답했다. "소이랑 싸운 거지? 다들 그러던데." 나라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근데 왜 싸웠는지 아무도 정확히는 몰라. 그냥 한준 오빠가 뭐라고 했다가 소이가 화냈다는 거밖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그냥 신기해서." 나라연이 휴대폰을 내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너네 둘, 유치원 때부터 붙어 다녔다고 했잖아. 그런 게 이렇게 한순간에 깨질 수 있는 거구나 싶어서."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한순간에 깨질 수 있는 거구나. 그러나 나는 그게 한순간의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쌓여온 것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균열이 생기다가, 한준의 한마디로 마침내 갈라진 것뿐이었다. 나라연은 내 표정을 살피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다시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을 것이다. 십 년의 시간이 남에게는 몇 초짜리 가십으로 축소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이상하게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날 점심시간, 나는 매점 앞에서 소이가 다른 반 여자아이에게 뭔가를 빌리는 모습을 보았다. 지우개였다. 소이가 지우개를 안 챙겨온 모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미리 여분의 지우개를 챙겨서 소이의 필통에 넣어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소이는 낯선 아이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지우개를 빌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한동안 멀리서 지켜보았다. 소이는 지우개를 받아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 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며 자리로 돌아갔다. 소이는 그 지우개를 손에 쥔 채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필통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 손짓이 낯설었다. 십 년 동안 내가 봐온 소이의 손짓 중에, 저렇게 조심스럽고 낯선 것은 없었다. 이상하게도, 안도감과 상실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소이가 나 없이도 뭔가를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지만, 동시에 그 자리에 내가 없다는 사실이 가슴 한쪽을 도려내는 듯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 장면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우개 하나. 별것도 아닌 물건 하나가, 십 년의 시간을 대체하고 있었다. 소이는 나 없이도 살아갈 수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이제야 눈으로 직접 확인한 셈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이렇게 아픈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소이가 나 없이 잘 살아가길 바랐던 건 나 자신이 아니었나. 손을 놓아야 한다고 결심한 것도 나 자신이 아니었나. 그날 밤, 나는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펼쳤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써온 것이었다. 페이지마다 소이에 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소이가 오늘 뭘 잃어버렸는지, 소이가 오늘 뭘 힘들어했는지, 그리고 내가 그걸 어떻게 도왔는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는 낯선 사람의 기록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소이가 오늘 우산을 안 가져와서 내가 대신 챙겨줬다." "소이가 수학 시험을 걱정해서 밤새 문제를 풀어줬다." "소이가 친구랑 다퉜다고 해서 내가 대신 사과 문자를 대필해줬다." 사과 문자를 대필해줬다는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손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나는 소이의 우정에까지 끼어들었던 것이다. 소이가 스스로 화해할 기회조차, 내가 미리 가로챘던 것이다. 나는 그 일기장을 읽으며, 처음으로 무서운 생각을 했다. 이게 정말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소이를 통해 나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던 것뿐일까. 소이가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은근히 바라온 건 아닐까. 그런 마음이 배려라는 이름으로 십 년 넘게 위장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일기장의 마지막 몇 페이지는 최근 것이었다. 시험 범위를 정리해준 기록, 소이의 일정을 대신 챙겨준 기록. 그리고 그 페이지들 사이 어딘가에, 나는 단 한 번도 소이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이야,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소이야, 내가 없어도 괜찮겠어. 그런 질문을 나는 한 번도 던진 적이 없었다. 나는 그저 필요한 것을 알아서 채워주는 사람이었을 뿐, 소이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 일기장을 덮으며, 나는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손을 놓아야 한다고. 소이가 스스로 뭔가를 해낼 기회를 줘야 한다고. 그것이 소이를 위한 일인지, 나를 위한 일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지만. 창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소이의 얼굴이, 지우개를 조심스럽게 필통에 넣던 그 손짓이, 자꾸만 떠올랐다. 나는 몇 번이고 몸을 뒤척였다. 결심은 결심이었지만, 그 결심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 나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소이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려는 걸 보았다. 그 표정에는 결심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평소보다 곧게 세운 어깨, 살짝 앙다문 입술. 소이가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 할 때 짓는 표정이라는 걸, 십 년을 지켜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순간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는 걸 느꼈다. 소이가 뭐라고 말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사과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일까. 교실 문을 넘어서던 소이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졌고, 목구멍이 사포처럼 껄끄러워졌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과, 이번에는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머릿속을 헤집었다. 소이의 입술이 열리려는 순간. 나는 그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채로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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