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비밀, 지켜주기로 했다

5화

체육대회가 끝난 뒤로 두 사람은 부쩍 가까워졌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이서준은 종종 하늬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처음엔 우연이었다. 두 번째부터는 우연이 아니었다. "또 이 방향이야?" 윤하늬가 눈을 흘겼다. "집 방향이 같다니까." "저번엔 반대 방향이라며." "그, 그건 잘못 안 거고." 이서준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빠졌다. '미쳤다, 거짓말이 왜 이렇게 티가 나지.' 윤하늬는 픽 웃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골목 편의점 앞에서 삼각김밥을 나눠 먹기도 했다. 플라스틱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참치마요와 불고기를 반씩 나눠 먹는 게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있었다. "오늘도 알바야?" "어. 열 시까지." "매일 하는 거야?" "평일엔 거의." 윤하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젓가락 대신 손으로 삼각김밥 포장지를 뜯는 손끝이 익숙했다. 몇 번이나 해봤는지 포장지가 한 번에 쭉 벗겨졌다. "돈 많이 필요해?" "뭐, 그냥. 우리 엄마 병원비가 좀 있어서."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편의점 형광등 아래서, 윤하늬의 옆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창백해 보였다. 이서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가 아프신데." "신장이 안 좋으셔. 透析(투석) 받으러 다니시고." "아버지는……" "안 계셔. 어릴 때 나가셨어."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바람이 편의점 유리문을 흔들며 지나갔다. 딸랑, 종소리가 났다.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윤하늬는 삼각김밥 포장지를 벗기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알바하는 거야. 학교에서는 굳이 얘기 안 해. 다들 나 신부감 1위라고 놀리는데, 그런 얘기 하면 분위기 이상해지잖아." "그거랑 이게 왜 상관있어." "동정받기 싫으니까." 윤하늬가 픽 웃었다. 그 웃음이 평소의 장난스러운 웃음과는 조금 달랐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눈은 웃지 않는, 그런 웃음이었다. "동정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거야." "그래도 싫어." 단호한 말이었다. 이서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삼각김밥을 씹던 턱이 멈췄다. '뭐라고 해야 하지. 위로하려다 더 상처 줄 수도 있잖아.' 그러다 문득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비슷한 거 있어." "뭐가?" "우리 형, 이서율." "아, 그 무서운 사람." 윤하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체육대회 날 봤던 그 서늘한 인상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어릴 때부터 늘 형이 먼저였어. 성적도, 상장도, 부모님 표정도." 이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편의점 밖 가로등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그렸다. "초등학교 때 반에서 그림 대회 나갔는데, 나는 참가상 받고 형은 대상 받았어. 그날 저녁에 아버지가 나한테 한 말이 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서율이 반만 따라가라.' 그거였어." 윤하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삼각김밥을 씹던 입이 멈춰 있었다. "그때부터 그냥, 있어도 없는 사람 같았어. 그래서 신분 숨기는 게 오히려 편해. 명성그룹 아들이 아니라 그냥 이서준으로 보이는 게."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골목을 지나며 낙엽을 굴렸다. 파스락, 파스락. 낙엽이 발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우리 둘 다 뭔가 숨기고 사네." 윤하늬가 낮게 말했다. "그러네." "근데 이상하게 너한테는 숨기는 게 별로 안 힘들어." 말이 끝나자마자 윤하늬는 스스로도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두 뺨이 살짝 붉어졌다.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서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지금 이거 무슨 의미야. 그냥 친구로서 하는 말인가, 아니면……' 생각이 거기까지 뻗어나가자 귀 끝이 뜨거워졌다. "나도."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윤하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편의점 파라솔 아래,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지나가던 오토바이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침묵, 왜 이렇게 편하지.' 윤하늬는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땐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서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명성그룹 이서준으로 살 때는 이런 시간이 없었는데.' 그 순간, 윤하늬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부르르, 진동이 테이블을 타고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까지 붉게 물들었던 두 뺨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엄마?"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떨렸다. "여보세요…… 네? 언제부터요?" 짧은 정적. 윤하늬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전화기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갔다. "지금 가요, 지금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윤하늬의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휴대폰을 쥔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덜컹,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야." "엄마가…… 병원에서 응급실로 옮겼대." 윤하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겁먹은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방금 전까지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가방을 어깨에 걸치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이서준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데려다줄게." "괜찮아, 버스 타면……" "지금 그럴 시간 없잖아." 이서준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말투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목소리 톤부터가 달랐다. 명령하듯, 그러나 다급하게. 그는 휴대폰을 꺼내 박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받았다. "지금 당장 와 줘요. 급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서준은 위치를 짧게 불러줬다. 편의점 이름, 골목 방향, 시간까지 정확하게. 윤하늬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알바하는 평범한 학생이던 남자애가, 지금은 순식간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투도, 눈빛도,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도 전혀 달랐다. '이게 뭐야. 갑자기 딴사람 된 것 같잖아.' 윤하늬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엄마가 걱정되는 마음과,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애에 대한 낯선 감정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곧 온대. 조금만 기다리자." 이서준은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손목을 잡은 손에서 미세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 온기가 지금 이 순간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윤하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골목 끝에서 검은 세단의 헤드라이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두 개의 빛이 어둠을 가르며 점점 커졌다. 그 빛이 두 사람을 향해 정확히 다가오는 순간, 윤하늬는 문득 이서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세상이 얼마나 큰 것인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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