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야간자율학습 시간이었다.
형광등 불빛이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교실 안, 책상마다 고개를 처박은 아이들의 뒤통수가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연필 굴러가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누군가의 낮은 하품 소리.
그 사이에서 이서준은 문제집을 펼쳐 놓은 채 글자를 눈으로만 훑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도 담임은 교실 앞 게시판에 전국 모의고사 순위표를 붙였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 자기 이름을 찾았다.
이서준도 그 틈에 끼어 시선을 위로 올렸다.
1등.
이서율.
같은 학년, 다른 학교, 그것도 전국 1등이라는 이름이 종이 맨 위에 박혀 있었다.
"야, 이서율이 누구냐? 완전 괴물이네."
"몰라. 매번 저기 있잖아."
쌍둥이 형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이서준 자신조차 매번 그 이름 앞에서 숨이 막혔다.
가슴 한복판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앉았지만 문제집의 숫자들은 눈앞에서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또야.'
의자를 뒤로 밀었다.
드르륵, 소리가 조용한 교실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몇몇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서준은 신경 쓰지 않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소리가 텅텅 울렸다.
한 칸, 두 칸, 세 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답답했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는 답답함이었다.
쌍둥이 형과 비교당하는 삶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웃었다.
"둘 다 잘하면 좋은 거 아니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서준은 속으로 되물었다.
'네가 매일 다른 사람 이름 뒤에서 사는 게 뭔지 알아?'
옥상 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누군가 걸쇠를 부러뜨려 놓은 지 오래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소문난 비밀 장소였다.
문을 밀자 밤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서늘한 공기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난간 위에 사람이 있었다.
교복 치마,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윤하늬였다.
같은 반, 신부감 1위, 늘 웃고 있던 얼굴.
급식실에서도, 복도에서도, 언제나 생글생글 웃던 그 얼굴.
그런데 지금은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다리가 난간 바깥으로 반쯤 나가 있었다.
이서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뛰어내리려는 거다.'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타타닥, 이서준의 발이 옥상 바닥을 박찼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안 돼!"
소리를 지르며 팔을 뻗었다.
손끝에 그녀의 옷자락이 스쳤다.
그대로 허리를 감싸고 뒤로 확 잡아당겼다.
몸무게가 실린 만큼 반동이 컸다.
두 사람이 함께 바닥으로 넘어졌다.
쿵, 소리와 함께 등이 콘크리트에 부딪혔다.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 통증보다 먼저 느껴진 건 다른 감각이었다.
부드럽고 묵직한 것이 가슴팍에 눌렸다.
숨이 턱 막혔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등의 통증과 가슴의 감각이 뒤섞여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됐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윤하늬가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녀는 이서준의 몸 위에 완전히 엎어져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손바닥 하나 거리였다.
속눈썹 아래로 흔들리는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콧등에 맺힌 땀방울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이서준의 얼굴도 순식간에 붉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너, 너 지금……"
목소리가 갈라졌다.
숨이 제대로 안 쉬어졌다.
"뛰어내리려던 거 아니야?"
윤하늬는 잠시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상황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눈치였다.
그러다 픽, 웃음을 터뜨렸다.
"뭘 뛰어내려요."
"난간에 서 있었잖아."
"별 보려고 올라선 거였는데요."
"뭐?"
"저기, 저 별자리 이름 뭔지 궁금해서. 스마트폰 앱으로 찾아보려고 했거든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당당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굴 상황인가.
이서준의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뒤늦게 찾아왔다.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그, 그럼 왜 다리가 밖으로……"
"난간이 좁아서 걸치고 앉았던 거예요. 별이 더 잘 보이길래."
윤하늬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치마를 대충 털어 내리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서준도 뒤늦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등이 여전히 얼얼했다.
그 순간 이서준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에 닿았다.
소매가 걷어 올라가 있었고, 그 안쪽에 살색 밴드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밴드 아래로 붉은 선이 살짝 비쳤다.
심장이 다시 한번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윤하늬는 재빨리 손목을 소매 속으로 감췄다.
동작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금까지의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 같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짧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바람 소리만 옥상을 가로질렀다.
"저기……"
"고양이한테 긁힌 거예요."
윤하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이 너무 빨랐다.
숨도 안 쉬고 뱉어낸 문장 같았다.
"고양이?"
"길고양이 밥 주다가. 새끼 고양이인데 사람 손을 안 타서."
"……그렇구나."
이서준은 더 묻지 않았다.
묻고 싶은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상처가 정말 고양이한테 긁힌 걸로 보여?'
속으로만 되뇌었다.
밴드 두 개가 정확히 나란히 붙어 있던 모양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윤하늬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치마 자락을 탁탁 털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넘겼다.
평소의 밝은 얼굴로 돌아오려는 듯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오늘 일은요."
"응."
"그냥, 없었던 걸로 해요. 알겠죠?"
눈빛이 단호했다.
마치 겁먹은 토끼가 어금니를 앙 물고 버티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는 걸, 이서준은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그게 뭔지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알겠지? 대답 안 해요?"
윤하늬가 재차 물었다.
목소리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이서준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윤하늬는 만족한 듯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옥상 문을 향해 걸어갔다.
걸음걸이가 아까와 다르게 딱딱했다.
철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서준은 그 자리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바람이 옥상을 훑고 지나갔다.
등이 아팠다.
가슴에 닿았던 감각도, 손목에 있던 밴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고양이한테 긁힌 상처가 저렇게 나란히 두 줄로 나나.'
손톱으로 긁힌 상처라면 모양이 저렇게 일정할 리 없었다.
자세히 본 건 아니었지만, 그 붉은 선의 각도와 길이가 이상하게도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설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서준은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오해하는 거겠지.'
하지만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하늘의 별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까 윤하늬가 가리켰던 별자리도, 흐릿한 도시의 불빛 사이로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서준의 눈에는 더 이상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자꾸만 방금 닫힌 옥상 문 쪽으로 돌아갔다.
그 문 너머로 사라진 윤하늬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