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자정이 넘은 시각, 저택은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던 하녀의 발소리도,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던 그릇 소리도 모두 멈춘 지 오래였다. 창밖으로는 달빛조차 인색하게 스며들어, 방 안은 먹물을 풀어놓은 듯 캄캄했다. 등잔불조차 꺼진 방 안에서, 나는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손끝에 정신을 집중했다.
어젯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회복이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몸속 어딘가의 회로가 다시 채워진 감각. 마치 텅 비었던 저수지에 밤새 빗물이 스며든 것처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뭔가가 다시 고이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이런 식이었다. 완전한 탈진 이후 하루 정도가 지나면, 다시 최소한의 힘이 돌아왔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마나 회복이란 게 원래 그런 주기를 갖는 거라고, 별생각 없이 넘겼던 지식이었는데, 이 몸에 옮겨온 지금에 와서야 그 감각 하나가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됐다. 해보자.
나는 손끝에 의식을 모았다. 전생에서 반파 소환을 쓸 때 외웠던 심상을 다시 떠올렸다. 검은 안개, 뼈와 살이 뒤섞인 형체, 주인의 명령에만 반응하는 사역마. 그 심상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려 넣었다. 마치 뇌 속에 조각칼로 새기듯이, 지우고 다시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리고.
손끝이 미세하게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거다.
검은 기류가 손끝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젯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진하고 짙은 안개였다. 어젯밤엔 그저 손끝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연기 한 줄기가 고작이었는데, 오늘은 마치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뭔가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걸쭉하고 무거운 기류가 쏟아져 나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가락 끝이 후들거렸다. 관자놀이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기류를 붙잡아 형체를 만들어내려 애썼다. 마치 손끝으로 진흙을 반죽하는 느낌이었는데, 반죽할수록 그 진흙이 내 정신력을 그대로 빨아먹는 것 같았다.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흩어질 것 같아서,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버텼다.
한 번, 형체가 흐트러졌다. 검은 안개가 순간적으로 풀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지려 했다. 나는 다급히 손을 뻗어 그 흩어지는 잔재를 다시 끌어모았다. 두 번, 세 번, 실패와 실패가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정신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는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손끝이 저릴 정도로 흥분됐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나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무릎 아래 바닥이 축축해질 정도였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눈앞이 잠깐씩 흐릿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이, 다른 모든 감각을 짓누르고 있었다.
검은 안개가 서서히 뭉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뭉친 그림자였던 것이, 점점 형체를 갖춰갔다. 짐승의 골격 같은 것이 어렴풋이 드러나고, 그 위로 검은 살덩어리 같은 것이 덮이며, 마침내 눈처럼 보이는 두 개의 빛점이 켜졌다.
됐다.
형체가 완성되는 순간, 나는 뒤로 쓰러질 뻔했다.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바닥을 짚은 손이 미끄러졌고, 순간적으로 시야가 새까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순간의 성취감이 그 모든 고통을 상쇄시켰다.
눈앞에는 작은 짐승 같은 것이 웅크리고 있었다. 늑대와 도마뱀을 섞어놓은 듯한 형체였는데, 몸 전체가 검은 안개로 뒤덮여 있어서 정확한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크기는 어른 무릎 정도, 등줄기를 따라 뭔가 뾰족한 돌기들이 솟아 있는 것 같았고, 그 위로 검은 안개가 끊임없이 일렁이며 흘러내렸다.
"...너."
나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목이 다 말라붙어서 그 짧은 한 글자를 내뱉는 데도 힘이 들었다. 그 형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지능이라 부를 만한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확실히 나를 주인으로 인식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머릿속으로 얕은 연결감이 흘러들어왔다. 마치 실 하나로 이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실 너머로 아주 원초적인, 배고픔이나 경계심 같은 감정의 파편들이 스쳐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전생에서 부렸던 반파 소환수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완성된 소환진 위에서, 정해진 형태로 불러내는 것이었으니까. 이건 뭐랄까, 갓 태어난 짐승 같았다. 아직 이름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묵아."
나는 그 이름을 붙였다.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그냥 검다는 뜻의 그 글자가 입에서 나왔을 뿐이었다. 그 짐승이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음에 든다는 건지, 아무 상관 없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손을 뻗어 그 검은 안개를 만져보려 했다. 손끝이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뭔가 단단한 표면에 닿았다. 실체가 있었다. 진짜였다. 감촉은 차갑고 매끄러웠는데, 마치 얇은 비늘 위에 얼음이 살짝 덮인 듯한 느낌이었다.
"성공이다."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웃음이 나왔다. 전생 이후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었던 것 같았다. 몸은 만신창이였는데도,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는데도, 그 웃음만큼은 진짜였다. 이 저택에 떨어진 이후로 내내 짓눌려 있던 뭔가가, 아주 작게라도 풀린 기분이었다.
이제 시작이다. 이 힘을 조금씩 키워나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순간,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시간에 누가. 발소리는 하나였고, 조심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성큼성큼, 뭔가에 쫓기듯 다급한 걸음이었다. 나는 급히 묵아를 향해 눈짓했지만, 이 녀석이 명령을 알아들을 만큼 훈련된 것도 아니었다. 묵아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그리고 문 쪽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숨길 시간도, 방법도 없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채서연이었다.
등잔불도 없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굳었다. 손에 들고 있던 촛대가 흔들리며 촛농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지나쳐 묵아에게 꽂혔다. 그 검은 형체를 본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서 뭔가가 완전히 무너져내리는 게 보였다. 마치 오랫동안 애써 붙잡고 있던 실 한 가닥이 그 자리에서 툭 끊어져버린 것처럼.
"저주받은 것들이... 결국..."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절규에 가까웠다. 그녀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다시 앞으로 다가섰다. 두 가지 마음이 그녀의 몸 안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아들의 몸에... 저런 것을..."
"어머니, 아닙니다."
나는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지 못했다. 무릎이 꺾이면서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나는 안간힘을 써서 고개를 들었다.
"제 말을 들어주세요. 이건 제가 통제할 수 있는 힘입니다. 위험하지 않습니다."
내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그마저도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 상태로 무슨 설득이 되겠나 싶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미 이성이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촛대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눈에는 눈물인지 광기인지 구분이 안 되는 무언가가 고여 있었다. 그녀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드는 걸, 나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검이었다.
저 검을 어디서, 왜 늘 품에 지니고 있었는지, 그 순간엔 궁금해할 겨를조차 없었다. 다만 그 검이 뿜어내는 은은한 빛만큼, 등줄기에 소름이 더 진하게 돋았다.
"이번엔... 확실히 끝내겠다."
그녀가 검을 치켜들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슬픔과 광기가 뒤섞여 있었다. 마치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것을 베어야 하는 사람의, 그 뒤틀린 결심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이번엔. 그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됐다. 이번엔이라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뜻인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몸에 남은 힘이라곤 겨우 무릎을 짚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손끝 하나 움직이는 데도 온몸의 신경을 다 끌어모아야 할 지경이었다. 묵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이 녀석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니 할 마음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묵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웅크린 채,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만 내고 있을 뿐이었다.
황금검이 어둠 속에서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