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뿐인데 천장의 무늬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무 서까래에 금박을 입힌 문양이 촘촘히 새겨진 천장이었고, 방금까지 나를 부르던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남아 웅웅거렸다. 설이라고 했나.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가 내 팔을 붙잡고 흔들며 도련님, 도련님 하고 외치는 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건만, 정작 정신이 든 순간 마주한 건 내 것이 아닌 손이었다.
작고 하얗고 손톱 밑에 흙 한 점 묻지 않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매끈한 손. 나는 그 손을 눈앞에 들어 올린 채 한참을 굳어 있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보았다. 접혔다. 다시 펴보았다. 펴졌다. 내 뇌가 명령을 내리는 대로 순순히 움직이는 게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이게 내 손이라니. 씨발, 이게 뭐야. 마흔 넘게 살아본 것도 아니고 딱 서른에 죽었는데, 그 서른 해의 기억을 통째로 짊어진 정신머리가 일곱 살배기 몸뚱이에 처박혀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받아들일 시간조차 나에겐 사치였다.
숨을 쉬는 것조차 낯설었다. 폐가 작으니 숨이 얕았고, 심장이 작으니 박동이 빨랐다. 서른 살 몸뚱이의 감각으로 살아온 정신이, 이 조그마한 심장의 두근거림을 마치 남의 것처럼 관찰하고 있었다. 이거 완전 남의 살에 내 정신 이식한 꼴이잖아. 웃기지도 않았다.
"도련님, 왜 그러세요? 눈이... 눈이 이상해요."
설이가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 아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는데, 그 떨림이 아이답지 않게 절박했다. 나는 그제야 방 한쪽에 걸린 청동 거울로 시선을 돌렸는데, 거울 속에서 나를 마주 보는 얼굴은 낯설다 못해 남의 초상화 같았다. 검은 머리칼, 동그란 눈,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뺨. 이하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었다는 걸, 나는 스스로도 아직 알지 못하는 채로 이미 그 이름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거울 속 얼굴을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뺨은 물렁했고, 이마는 낮았고, 눈썹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듯 가늘었다. 내가 알던 서른 살 사내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얼굴이 죽고, 이 얼굴이 살아 있었다. 이하준. 이름을 속으로 되뇌어보는 것만으로도 낯설음이 가시지 않았다.
기억이 조각조각 흘러들어왔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 아내를 죽인 자의 목을 손으로 조르며 웃었던 기억.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던 그 순간의 쾌감과, 그 쾌감 끝에 밀려온 허무. 아내의 얼굴이 점점 흐려지던 순간, 복수를 끝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버티던 마지막 숨. 그리고 그 웃음 끝에 찾아온 허무, 그 허무가 채 가시기도 전에 심장이 멈췄던 감각까지. 그런 기억을 안고 이세계 귀족가의 어린 아들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은 감동적이라기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과율이란 게 있다면 지금 나를 대상으로 억까를 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첫 번째 억까. 서른 살에 죽었다.
두 번째 억까. 일곱 살 몸에 처박혔다.
세 번째 억까. 이름도, 부모도, 가문도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다.
이쯤 되면 신이 나를 놀리려고 태어나게 한 게 아닐까 싶었다.
"도련님, 어머니 마님이 오고 계세요!"
설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문밖에서부터 발소리가 무섭게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 발소리에는 이상하게도 서늘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걸음마다 바닥이 얼어붙는 듯한 소리가 들렸는데,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다. 나는 등줄기가 뻣뻣해지는 걸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일곱 살짜리 다리 근육이란 게 이렇게 부실한 물건이었나 싶을 정도로. 서 있으려고 벽을 짚었는데 손바닥에 땀이 배어 미끈거렸다.
설이는 이미 방 한쪽으로 몸을 피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저 반응이 정상인가. 어머니가 오는데 자식이 아니라 시녀가 저렇게 겁을 먹는다고?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선 여자는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그 아름다움 위에 덧씌워진 표정은 아름다움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황금빛 검을 곧게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입술은 소리 없이 뭔가를 되씹는 것처럼 씰룩거렸다. 옷자락에서는 흙먼지 냄새와 쇠 비린내가 동시에 풍겼는데, 방금까지 어딘가에서 검을 휘두르다 달려온 사람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다. 이 사람이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하준의 진짜 어머니였다는 것을.
"채서연."
설이가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뱉었다. 그러니까 저 여자가 채서연이었다.
"너."
채서연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검 끝이 내 목 앞에서 정확히 멈춰 섰다. 검날에 비친 내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검 끝과 목의 거리는 손가락 한 마디도 채 되지 않았다.
"너는 누구지."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지는 걸 피부로 느꼈다. 마법이라는 게 실재한다면 이런 식으로 감지되는 거구나, 하고 이상하게 냉정한 생각이 스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으나 정신은 오히려 명료해졌다. 서른 해를 살아낸 정신머리가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다는 게 다행인지 재앙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머릿속이 미친 듯이 회전했다. 이 상황을 정리하면 이랬다. 첫째, 나는 이하준이라는 아이의 몸에 들어와 있다. 둘째, 이 아이의 어머니는 지금 검을 들고 있고, 그 검은 정확히 내 목을 겨누고 있다. 셋째, 그녀는 이미 내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것 같다. 셋 다 최악이었다. 하나만 최악이어도 좋았을 텐데, 인과율은 항상 나에게 관대함이라곤 없었다.
"저는..."
입을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사실 저는 당신 아들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죽어 넘어온 서른 살 아저씨입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할 수 있다 해도 검 끝이 목 앞에 있는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먹힐 리가 없었다. 목에 침을 삼키려는데 목젖이 움직이는 것조차 검날에 닿을까 무서웠다.
"내 아들의 기운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
채서연의 목소리에 균열이 갔다.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균열이었다. 손끝이 떨리는데도 검을 쥔 힘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하준이는... 하준이는 어디 있어. 네가 뭘 한 거야."
검 끝이 내 목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도망칠 다리도 없고 막아설 힘도 없는 일곱 살짜리 몸으로, 나는 그저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다. 뭐라도 해야 했다.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나, 아니면 진실을 말해야 하나. 판단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손끝에서 뭔가가 흘러나왔다.
검은빛이었다.
실처럼 가느다란 검은 기류가 내 손가락 끝에서 새어나와 허공에 작은 소용돌이를 그렸다. 그 검은빛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손가락 사이를 휘감았고,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며 방 안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채서연의 눈동자가 그 순간 흔들렸다. 검 끝도 함께 흔들렸다.
"이건..."
그녀의 표정이 분노에서 경악으로 바뀌는 걸 나는 똑똑히 보았다. 붉게 충혈되었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커졌고, 검을 쥔 손의 떨림이 더 심해졌다. 설이는 방 한쪽에서 숨을 멈춘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뭔가를 말하려던 참이었다. 나는 아직 몰랐다. 방금 내 손끝에서 새어나온 그 검은 기류가, 전생에서 나를 복수의 화신으로 만들어준 소환 능력의 흔적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