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탈진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몸속의 모든 기력이 배수구로 빨려 나간 듯한 감각, 손끝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나는 방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숨만 겨우 몰아쉬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목구멍 안쪽이 사포처럼 거칠었고, 심장은 방금 백 미터를 전력으로 달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는데 그 박동 하나하나가 갈비뼈를 두드리는 것 같아 아팠다. 손을 들어보려 했으나 팔이 통째로 남의 것 같았다. 신경은 연결되어 있는데 근육이 반응을 거부하는 그 이질적인 감각. 이게 마나 고갈이라는 건가. 아니면 그냥 어린애 몸뚱이가 어른의 정신력을 버티지 못한 걸까. 어느 쪽이든 결론은 하나였다. 죽기 직전이었다.
"도련님, 정신 차리셔야 해요." 설이가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의 손아귀 힘이 이렇게 셀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절박하게 매달리는 손길이었다. 손톱이 옷을 뚫고 살에 박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그 통증조차 지금은 반가웠다. 적어도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흐릿하게 흔들리다가 서서히 초점이 맞았고, 눈앞에는 채서연이 여전히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검 끝은 아래로 향해 있었으나 손목의 각도만 보아도 언제든 다시 올려칠 수 있다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검신에 묻은 옅은 핏자국이 등잔불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내 피인지 아니면 아까 그 검은 기류가 남긴 흔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그 검을 쥔 손이, 방금까지 나를 향해 내려찍혔던 그 손이, 지금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만은 똑똑히 보였다.
"괜찮으냐." 이건우가 아내의 앞을 슬쩍 가로막으며 물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는데, 그 안에 걱정이 섞여 있다는 걸 알아챈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목이 메었다.
서른 살 먹은 정신이 일곱 살 몸뚱이에 갇혀 있다는 것부터가 지랄맞은 일이었는데, 이제는 그 몸뚱이의 부모가 나를 죽일지 살릴지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게 더 지랄맞았다. 씨발, 진짜. 인생 두 번째 판인데 시작부터 순탄한 게 하나도 없었다. 전생에는 배신당해 죽었고, 이번 생은 시작하자마자 검에 맞아 죽을 판이었다. 인과율이 억까를 부려도 이렇게 부릴 수가 있나.
"괜찮습니다." 나는 겨우 대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채서연이 검을 완전히 내리지 않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그 아름다움 위로 드리운 표정은 도무지 읽어낼 수 없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그 둘이 뒤섞인 무언가인지. 눈동자만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그게 눈물 때문인지 살기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가 낮고 갈라져 있었다. "네 손끝에서 나온 그 검은 것."
나는 대답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여기서 뭘 어떻게 설명해야 이 여자가 나를 다시 베지 않을까. 전생에 소환술사였다고 하면 믿어줄까. 아니, 애초에 소환술이라는 단어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판에. 머릿속에서 온갖 변명들이 떠올랐다가 부서졌다. 갑자기 눈이 이상해졌다고 할까. 잠결에 헛것을 봤다고 우길까. 그 어느 것도 검을 든 여자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저도 처음 겪는 일이라서요."
"거짓말." 채서연의 손목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설이가 숨을 삼키며 나를 감싸듯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여덟 살짜리 아이가 자기보다 몸집도 크지 않은 나를 지키겠다고 팔을 벌리는 그 모습이,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올 만큼 어이없었다. 웃을 여유는 조금도 없었지만.
"서연." 이건우가 아내의 팔을 잡았다. "이 아이가 방금 목숨을 걸고 네 검을 막았다. 그게 위협이었다면, 왜 하필 그 순간에 나타났겠느냐."
채서연의 얼굴에 잠깐 균열이 생겼다. 이성과 감정이 부딪치는 소리가 눈에 보일 것 같았다. 검을 쥔 손목이 흔들렸다가 다시 굳었다가, 다시 흔들렸다. 그 짧은 몇 초가 마치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제가..." 나는 말을 꺼냈다. 목소리가 여전히 떨리고 있었으나 멈추지 않았다. "제가 원래 있던 곳에서, 저는 뭔가를 불러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소환술이라고 불렀습니다."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스쳤다. 등잔불의 심지가 타들어가는 작은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소환술." 채서연이 그 단어를 되뇌었다. 낯선 단어를 입에 담는 사람의 어색함이 묻어났다. 마치 처음 배운 외국어를 발음하듯 어색하게, 그러나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듯이.
"그게 방금 그 검은 기류입니까." 이건우가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보다는 순수한 궁금증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이 남자는 적어도 나를 즉결처분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마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저번 삶에서 마지막으로 썼던 게... 오래전이라서요."
저번 삶.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채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이건우의 짙은 눈썹이 살짝 좁혀졌다.
"저번 삶이라니." 채서연의 목소리가 위험할 정도로 낮아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 이건 너무 빨리 꺼낸 카드였나. 나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이제 와서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혀를 깨물어서라도 멈추고 싶었지만 이미 방아쇠는 당겨진 뒤였다. 아까 그 소환술의 흔적을 목격한 이상, 이 부부는 결코 그냥 넘어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설픈 변명 하나 더 붙였다가는 오히려 더 큰 의심만 살 뿐이었다.
"저는 하준이가 아닙니다." 나는 결국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서 얼버무리면 더 의심만 살 것이었다. "저는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몸에서 눈을 떴습니다."
채서연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검을 쥔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손등의 혈관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녀의 다리가 살짝 휘청였는데, 남편이 곁에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무너져 내렸을지도 몰랐다.
"거짓말이라고 해줘." 그녀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갈라지다가 결국 무너졌다. "제발, 거짓말이라고."
그 순간 검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쨍, 하는 금속음이 방 안에 울렸다. 채서연은 더 이상 검을 쥐고 있을 힘조차 없어 보였다.
이건우가 아내를 붙잡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무너지듯 몸을 기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옥죄듯 아팠는데, 이게 동정심인지 아니면 이 부부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죄책감인지 나로서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하준이 아니었다. 이하준의 몸을 빌려 숨 쉬고 있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내 아들은." 채서연이 남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물었다. "내 하준이는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건 나조차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소년, 이하준. 그 아이의 영혼이 어디로 갔는지, 완전히 소멸했는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여전히 존재하는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진짜 죄책감처럼 느껴졌다.
"모르겠습니다." 나는 겨우 그 말만 뱉었다.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방 안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채서연의 어깨가 미약하게 떨렸다. 울음을 참는 소리였는데, 그 소리가 어떤 검보다 더 날카롭게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검에 베이는 것보다 이게 더 아팠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자." 이건우가 낮게 말했다. "모두가 지쳤다. 서연, 아이를 재우고 우리도 쉬어야 한다."
채서연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검을 완전히 내려놓았으나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전히 경계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완전한 신뢰는 아니었다. 그저 유예였다. 언제든 다시 그 검을 들 수 있다는 무언의 경고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듯 방을 나갈 준비를 했다. 나가는 이건우의 뒷모습에서, 나는 그가 잠깐 나를 돌아보았다는 걸 눈치챘다. 그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완전한 적의는 아니었다.
설이가 나를 부축해 자리에서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지도 못했는데, 그 작은 몸이 내 체중을 온전히 받쳐주는 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설이의 옷소매가 어느새 눈물로 젖어 있었다.
이건우와 채서연이 방을 나가고 문이 닫혔다. 나는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바닥에 도로 주저앉았다.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도련님, 정말 무서웠어요." 설이가 내 옆에 앉아 훌쩍였다. "마님이 그러실 줄은..."
"괜찮아. 이제 끝났어." 나는 그렇게 말했으나,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끝난 게 아니었다. 이제 막 시작이었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시각에 나는 조용히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았다. 방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어와 방바닥에 희미한 무늬를 만들었다. 손끝을 내려다보며 아까의 그 검은 기류를 떠올렸다. 아직 통제할 수 없었지만, 그게 진짜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손끝에 다시 힘을 모아보았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몇 번이고 시도했으나 그저 손가락 끝이 저릿한 감각만 돌아왔을 뿐, 아까와 같은 검은 기류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마지막 힘을 전부 쏟아부은 뒤라 다시 채워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나는 아직 몰랐다. 그 검은 기류가 단순한 흔적이 아니라, 전생에서 나를 복수의 화신으로 만들어준 소환술의 파편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