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늘부터 거절합니다

4화

"준호야, 이번 주에도 청소 좀 바꿔줄 수 있어?" 반 친구 하나가 또 말을 걸었다. 이번 주 세 번째였다. 교실 뒷문 쪽에서 걸어오는 걸음걸이부터 알았다. 저 걸음, 저 웃음. 뭔가를 부탁할 때 짓는 웃음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요청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한 번 들어주면 다음이 더 쉬워지는 것처럼. 마치 내가 그런 용도로 존재하는 것처럼. 서연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도와주는 거야, 못 거절하는 거야. 그 말이 머릿속에서 딸깍, 스위치처럼 켜졌다. "어... 이번엔 좀." 말이 목에 걸렸다. 반 애들 몇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얼굴로, 목으로, 손끝으로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손끝이 이미 차가워지고 있었다. "어? 왜, 무슨 일 있어?" 친구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하지만 그 가벼움 뒤에 뭔가 걸려 있었다. 당연히 들어줄 거라는, 그런 확신 같은 것. "아니, 그냥... 이번 주는 좀 힘들 것 같아서." 말이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을 숨기려고 손끝을 꾹 눌렀다. 효과는 없었다. "에이, 뭐야, 그동안 잘해줬으면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반 애들 몇이 눈치를 주고받았다. 누군가는 작게 헛기침을 했고, 누군가는 시선을 피했고, 누군가는 오히려 더 빤히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들 속에서 숨이 막혔다. 머릿속에서 여러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떠들었다. 그냥 해줘. 뭐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아니야, 이번엔 안 돼. 세 번째잖아. 근데 안 하면 분위기 이상해지잖아.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게 뭐가 문제야. ...문제잖아. 결국 나는 다시 대답했다. "...알겠어. 바꿔줄게."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뭔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을 텐데. "거봐, 준호 착하잖아." 웃음소리가 퍼졌다. 나는 웃지 않았다. 착하다는 말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무거웠다. 착한 게 아니라, 그냥 거절을 못 하는 것뿐인데. 그 둘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 이 교실에 몇이나 될까. 그 순간 도서실 창가 자리를 지나가는 서연의 모습이 보였다. 유리창 너머로, 짧은 순간이었다. 서연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서연은 이미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표정에 스친 게 뭐였는지, 나는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 방과 후, 서연이 먼저 나를 불렀다. 교실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친 채, 팔짱을 끼고. 그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뜻. "아까 그거 봤어." "어.."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뭘 봤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물을 필요도 없었다. "거절하려고 했잖아. 근데 왜 다시 들어줬어." 서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날카롭다기보다는, 정확했다. 어디를 찔러야 하는지 아는 사람의 말투였다. "분위기가... 좀 그랬어." "분위기가 왜 네 책임이야." 말이 없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대답이 몇 개나 떠올랐는데,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마다 전부 부끄러워졌다. 분위기를 망치기 싫었어. 다들 나 싫어할까 봐. 착한 애로 남고 싶었어. 어느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어느 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전부 다 진짜였다. "넌 뭐가 무서운 거야?" 서연이 물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 같았다.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알고 싶어서. 무서운 거.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생각은 해봤는데 답을 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싫어하는 게... 무서운가 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입에서 나오고 나서야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누가 널 싫어할까 봐?" "그냥... 다들 나 좋다고 해서. 그거 다 거짓말이 될까 봐." 말을 하면서도 이게 무슨 말인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거짓말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이지.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말한 게, 사실은 내가 잘해줬기 때문이라면. 그럼 내가 잘해주지 않는 순간, 그 좋아함도 같이 사라지는 거잖아. 그러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서비스였던 거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서. 근데 웃을 상황이 아니라서, 그냥 참았다. 서연이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화가 아니라 다른 게 담겨 있었다. 안타까움 같은 거였을까.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나는 네가 뭘 해줘서 좋은 게 아니야." 그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정말로 쿵 소리가 난 것 같았다. 가슴 안쪽 어딘가에서. "그냥 네가... 사람으로 보여서 좋아." 짧은 말이었는데 무게가 이상하게 컸다. 나는 그동안 사람이 아니라 편리한 뭔가로 존재했던 것 같았다. 청소를 대신 해주는 애, 부탁을 잘 들어주는 애, 화 안 내는 애. 그런 수식어들 뒤에 정작 준호라는 이름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 들은 어떤 칭찬보다 크게 다가왔다. 착하다, 잘한다, 고맙다. 그 어떤 말도 이만큼 마음에 박히지 않았는데. "...그게 무슨 뜻이야."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천천히 알아가면 되지." 서연이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날카롭던 목소리와 전혀 다른 온도였다. 같은 사람 안에 이렇게 다른 온도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니,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걸까. 나만 하나의 얼굴로, 하나의 역할로 살아왔던 걸까. 교문을 나서면서도 서연의 웃는 얼굴이 눈에 남았다. 바람이 불었다. 운동장 저편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 나는 계속 그 말을 곱씹었다.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 걸음마다 그 말이 따라왔다. 버스 정류장을 지날 때도, 편의점 불빛을 지날 때도. 그 말 하나가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부탁보다 무겁고, 동시에 가벼웠다. 무거운 건 그 말의 진심이었고, 가벼운 건 그 말이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말이 나를 짓누르지 않고, 오히려 조금 띄워주는 느낌. 그런데 집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반 단체 채팅방이었다. 메시지 알림이 연달아 딸랑, 딸랑 울렸다. 무심코 화면을 켰다가, 나는 걸음을 멈췄다. 채팅방 안에는 이미 수십 개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맨 위에 고정된 말 한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준호 없이 청소 당번표 다시 짜자. 그 밑으로 이어지는 대화들을 읽어 내려가는 손끝이, 다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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