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늘부터 거절합니다

3화

다음 날 아침, 교실 문을 열기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또 수아겠구나. 교문 앞에서 한 번, 매점 앞에서 두 번, 그리고 오늘은 아예 교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선배! 오늘도 부탁이 있는데!" 역시나. 수아는 항상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나를 붙잡았다. 교문 앞, 급식실 앞, 복도 한가운데. 심지어 지금처럼 교실 앞, 애들이 다 지나다니는 그 타이밍까지. 거절하기 어려운 장소만 골라내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재주가 아니라 계산인 것 같기도 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계산할까. 아니, 할 수도 있지. "이번 주말에 축제 준비하는데 짐 옮기는 거 좀 도와주세요! 다들 알거든요, 선배가 이런 거 잘 도와준다는 거!" 주변에 있던 애들 몇이 이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는 웃고, 누구는 아예 팝콘 각도로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분위기였다. 아니,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나쁜 선배가 되는 분위기였다.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했다. 주말 오전에 특별한 일 없음. 짐 옮기는 거 몇 시간이면 끝날 거고.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고. 그런데 왜 마음은 이렇게 불편하지. "어... 그래, 알겠어." "역시 선배!" 수아가 손을 번쩍 들고 웃었다. 박수라도 칠 기세였다. 실제로 옆에 있던 애 하나가 박수를 살짝 쳤다. 그거 왜 치는 거야. 나는 왜 저렇게까지 신나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부탁을 들어준 거지, 뭘 잘한 것도 아닌데. 마치 내가 대단한 은혜라도 베푼 것처럼 반응하니까, 오히려 그게 더 부담스러웠다. 교실로 들어가는 내내 손끝이 간지러웠다. 뭔가 찜찜한데, 뭐가 찜찜한 건지 정확히 짚을 수가 없었다. *** 3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 복도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준호야, 잠깐 시간 돼?" 생활지도부 부회장, 지현 선배였다. 지현 선배는 3학년인데, 나이보다 성숙한 분위기 때문에 다들 어려워했다. 목소리 톤부터 다르고, 걸음걸이도 여유롭고, 눈빛도 흔들림이 없었다. 나도 그랬다. 저 선배 앞에서는 괜히 말을 골라 하게 됐다. "네, 선배." "이번에 학교 축제 안전 점검하는데 자원봉사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제가요?" 나는 순간 되물었다. 안전 점검이라니. 내가 그런 걸 왜. "응, 나 너 좋아하거든. 후배로서." 지현 선배가 웃으며 덧붙였다. 뒷말이 붙었는데도 앞말이 자꾸 걸렸다. 좋아한다는 말이 이렇게 무겁게 들리는 것도 처음이었다. 심장이 한 번 쿵 하고 내려앉았다가, 뒷말을 듣고서야 겨우 자리를 찾았다. 후배로서, 후배로서, 후배로서. 세 번쯤 속으로 되새겼다.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돼. 넌 항상 도움이 되잖아." 그 말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반박할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항상 도움이 된다는 말. 칭찬 같은데 왜 칭찬처럼 안 들리지. "고마워. 그럼 이번 주 토요일 오후에 시청각실로 와." "토요일 오후요?" "응, 왜, 시간 안 돼?" 머릿속에서 수아와의 약속이 스쳐 지나갔다. 주말 오전은 수아, 오후는 지현 선배. 어느새 주말 스케줄이 다 채워지고 있었다. "아니요, 됩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짜로 다른 일은 없었다. 문제는 다른 일이 없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물어볼 생각조차 안 했다는 거였다. 걸어가는 내내 마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좋아한다는 말 뒤에 항상 부탁이 붙었다. 후배로서 좋아한다, 그러니까 도와줘라. 선배로서 믿는다, 그러니까 나서줘라. 다 비슷한 구조였다. 그게 이상하다는 걸, 나는 그때까진 몰랐다. *** 방과 후, 도서실에 들렀다. 딱히 공부할 게 있어서는 아니었고, 그냥 사람 없는 곳에 좀 있고 싶어서였다. 창가 쪽 자리에 서연이 앉아 있었다. 매번 그 자리였다. 창밖 햇빛이 책 위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딱 그 자리. 나는 별생각 없이 그 옆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 자주 앉아 있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에 큰 변화는 없었다. 놀란 것도 아니고, 반가운 것도 아니고. "응. 조용해서." 짧은 대답이었다. 더 이어질 말이 없어서 나는 그냥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꺼내는 시늉을 하고, 사실은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그냥 앉아 있었다. "너는 뭐 자주 여기 와?" 서연이 되물었다. "어, 그냥... 사람이 좀 많아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 책상 위를 타고 울렸다. 하윤이었다. [오늘도 시간 되면 얘기 좀 해줘.]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짧은 한숨이었는데, 도서실이 워낙 조용해서 그런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연이 그 한숨을 봤다. 휴대폰 화면 쪽으로 살짝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나를 봤다. "매일 이래?" 서연이 물었다. 목소리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는데도, 그 질문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꾸중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것 같은데도. "어... 뭐, 그냥 도와주는 거지." "도와주는 거야, 못 거절하는 거야." 말이 툭 떨어졌다. 칼로 벤 것처럼 정확했다.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도와주는 거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정말 도와주는 거였나. 수아의 부탁, 지현 선배의 부탁, 하윤의 부탁. 전부 다 내가 먼저 하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나. 없었다. 매번 저쪽에서 먼저 다가왔고, 나는 매번 거절할 타이밍을 놓쳤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서연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캐묻지도 않고, 더 이상 신경 쓰지도 않는 것처럼. 그런데 그 짧은 문장이 하루 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도와주는 거야, 못 거절하는 거야. 못 거절하는 거였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휴대폰이 다시 한번 울렸다. 하윤이었다. 같은 문장, 물음표 하나 더. [오늘도 시간 되면 얘기 좀 해줘??] 나는 화면을 잠깐 들여다보다가, 그냥 도서실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다. 서연은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내일은, 내일은 좀 다르게 할 수 있을까.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또 똑같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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