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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서윤이 방문을 열어본 건 이 주 만이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끝이 서늘했다. 방 안은 서윤이가 마지막으로 나갈 때 그대로였다. 창문이 살짝 열려 있어 커튼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침대는 정리되어 있었지만 이불 한쪽 끝이 접힌 채였다. 서윤이의 습관이었다. 완벽하게 정리하지 않는 것. 어딘가 하나는 흐트러진 채로 두는 것. 책상 위에 악보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쇼팽 녹턴. 마지막으로 연습하던 그대로였다. 먼지가 살짝 앉아 있었다. 나는 그것도 함부로 털어내지 못했다. 손을 뻗어 악보를 넘기다가 손끝이 멈췄다. 연필로 적어놓은 글씨가 보였다. '아빠가 좋아하는 부분.' 한 소절 옆에 작은 별표가 그려져 있었다. 서윤이가 초등학생 때부터 그런 식으로 표시를 해두는 아이였다. 좋아하는 부분, 어려운 부분, 엄마가 봐주면 좋을 부분. 습관처럼 악보 여백에 자기만의 언어를 남겼다. 다음 장을 넘겼다. 또 있었다. '여기서 숨 쉬기.' 그 다음 장에는 동그라미가 세 개나 그려져 있었다. 어려워서 세 번 다시 짚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서윤이의 필체를, 그 아이의 표시 방식을, 어느 소절에서 손가락이 자주 엉키는지도. 숨이 막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창밖으로 가로등이 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실제로 소리가 날 리 없었지만, 그 시간의 골목은 늘 그렇게 조용했다. 서윤이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처음 건반을 눌렀을 때 그 소리에 자기가 먼저 놀라던 얼굴이 떠올랐다. 도, 레, 미. 서윤이는 그 세 개의 음만으로도 한참을 웃었다. 재능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지수를 닮았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말 속에 내가 없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몰랐던 게 아니라, 몰랐다고 믿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을 때 지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무슨 의미였는지, 나는 그때 궁금해하지 않았다. 궁금해했어야 했는데. 악보를 조심스럽게 덮었다. 그리고 방을 나왔다. 거실은 여전히 넓고 조용했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가 다시 껐다. 화면 속 사람들이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이상하게 낯설게 들렸다.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았다. 안에 든 게 뭔지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손이 자꾸 허공을 더듬었다. 뭔가를 쥐고 싶은데 쥘 게 없었다. 그때 서재 구석에 세워둔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바이올린 케이스였다. 검은색 가죽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열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결혼 전이었나. 서윤이가 태어나기 전이었나. 그보다 더 전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다가가서 케이스를 만졌다. 먼지가 손바닥에 묻었다. 손끝을 코에 가져다 대니 오래된 종이 냄새 같은 게 났다. 습기와 시간이 뒤섞인, 형체 없는 냄새였다. 잠금장치를 열자 삐걱, 하는 소리가 났다. 뚜껑을 들어 올렸다. 바이올린이 그대로 있었다. 현이 늘어져 있었고, 브릿지가 살짝 기울어 있었다. 활은 케이스 안쪽 홈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케이스 안감은 원래 붉은색이었을 텐데, 지금은 색이 다 빠져 갈색에 가까웠다. 바이올린 몸통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매끈했다. 광택은 사라졌지만 표면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손끝으로 현을 살짝 튕겨보았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조율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십 년 가까이 방치해둔 악기였다. 나는 활을 들었다. 손에 익지 않은 무게감이었다. 이 정도 무게였나, 싶었다. 예전엔 이걸 하루 종일 들고 있어도 팔이 아프지 않았는데. 활 끝으로 현을 그어보려는데, 손이 떨렸다. 손끝이 아니라 팔 전체가 떨렸다. 스물한 살 여름, 세 번째 오디션 결과를 확인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연습실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다들 종이 한 장을 보려고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나는 맨 뒤에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앞사람들의 표정이 갈렸다.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며 껑껑 뛰었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명단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명단을 세 번 확인했다. 손끝으로 이름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혹시 다른 페이지에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종이를 뒤집어보기도 했다. 네 번째 확인했을 때 옆에 있던 동기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음에 또 있잖아." 그 목소리가 다정했다는 게 오히려 더 아팠다. 다음은 없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오디션을 보지 않았다. 활을 케이스에 넣고, 그 케이스를 다시 열지 않았다. 대신 지수의 연습실 예약을 도맡았고, 지수의 콩쿠르 일정을 정리했고, 지수의 매니저가 되었다. 처음엔 그게 아주 작은 도움이었다. 연습실 시간표를 확인해주는 것, 악보 사본을 뽑아주는 것. 그러다 어느 순간 지수의 스케줄이 내 하루의 전부가 되어 있었다. 지수가 콩쿠르에서 상을 받을 때마다 나는 관객석 맨 뒤에서 손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쳤다. 그 손이, 한때는 활을 쥐던 손이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그게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재능이 나보다 크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재능을 위해 내 것을 내려놓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희생이냐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다. 말하면 말할수록 그게 진짜처럼 느껴졌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건 희생이 아니었다. 도망이었다. 떨어질 게 두려워서, 또 떨어질 게 두려워서, 애초에 무대에 서지 않는 쪽을 택한 것뿐이었다. 지수의 매니저라는 자리는 그 두려움을 감출 수 있는 가장 좋은 핑계였다. 활을 다시 케이스에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눈가가 뜨거웠다. 울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눈물이 나려는 걸 억지로 삼켰다. 휴대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서윤이었다. 영상통화 요청이었다. 화면 위에서 이름 세 글자가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나는 손끝의 먼지를 바지에 닦아내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밝아지기까지의 그 짧은 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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