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강현우는 캠퍼스에서 유명했다.
음대 최고의 재능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었다.
180이 넘는 키에 손가락이 유난히 길었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강의동 복도를 걸을 때도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갔다.
누군가는 그를 천재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그를 신이 내린 손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런 말들이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듣기 전까지는.
정기 연주회 날, 나는 우연히 그의 연주를 들었다.
쇼팽의 발라드였다.
건반을 누르는 손끝에서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재능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서지수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동아리 발표회, 학과 회식, 연습실 복도.
그 애의 시선은 늘 강현우를 따라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1초, 길어야 2초.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세고 있었다.
티는 안 냈지만, 나는 알았다.
삼 년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미세한 신호였다.
서지수는 강현우가 지나갈 때마다 바이올린 케이스의 손잡이를 살짝 고쳐 잡았다.
아무 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나는 그게 무의식적인 자기 방어라는 걸 알았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몸짓.
그해 겨울, 강현우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플루트 전공 윤서아.
청순한 이미지로 학과 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후배였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누군가는 축하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캠퍼스를 걷는 모습을 보고 서지수의 표정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나는 정확히 기억한다.
음악관 앞 벤치였다.
강현우가 윤서아의 어깨에 재킷을 걸쳐주는 장면이었다.
평범한 다정함이었다.
그런데 서지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날 밤, 서지수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나는 몇 초간 멍하니 화면을 쳐다봤다.
서지수가 나에게 먼저 전화를 건다는 건, 삼 년 동안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도현아, 나와줄 수 있어?"
목소리가 이상했다.
젖어 있었다.
나는 곧바로 나갔다.
겉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였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학교 앞 술집에서 서지수는 이미 취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안주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나 진짜 바보 같지."
서지수가 웃으며 말했다.
웃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그 대비가 나를 더 아프게 했다.
"뭐가."
"삼 년을 좋아했는데. 고백도 못 해보고."
그 순간 알았다.
삼 년.
고백도 못 해봤다는 그 삼 년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나와 서지수가 알고 지낸 시간과 정확히 같았다.
"강현우 선배야?"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게 들렸다.
서지수는 대답 대신 눈물을 닦았다.
그게 답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술집 안의 소음이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웃음소리, 잔이 부딪히는 소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노래.
그 모든 것이 우리 테이블만 비껴가는 듯했다.
"나 정말 별로지."
서지수가 내 어깨에 기댔다.
머리카락에서 익숙한 샴푸 향이 났다.
"너는 왜 이런 나를 계속 좋아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 자체가 이상했다.
마치 자신이 좋아할 가치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무슨 말을 해야 이 순간을 망치지 않을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냥, 네가 연주하는 게 좋아서."
내가 겨우 대답했다.
사실 그것 말고도 할 말은 많았다.
네가 웃을 때 좋다고, 네가 화낼 때도 좋다고, 삼 년 동안 매일 좋았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서지수는 한참 나를 쳐다봤다.
그 눈에 눈물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눈빛에 무언가 결심 같은 게 스쳤다.
나는 그게 나를 향한 마음이라고 믿고 싶었다.
"도현아."
"응."
"우리, 한번 사귀어 볼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삼 년을 기다린 말이었다.
귓가에서 맥박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나는 그 순간 아무것도 되묻지 않았다.
왜 지금인지, 왜 하필 오늘 밤인지.
그저 기뻤다.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뇄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가장 큰 실수였다.
왜 지금인지 물었어야 했다.
그날 밤 강현우와 윤서아가 함께 걷는 모습을 본 게, 서지수가 나에게 전화를 건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나는 그때 몰랐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
우리는 그날 이후 연인이 됐다.
서지수는 나에게 다정했다.
연습이 끝나면 늘 나를 기다렸고,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걸었다.
카페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먼저 기억해뒀고,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나눠 썼다.
누가 봐도 평범하고 다정한 연인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순간들이 있었다.
피아노 발표회 포스터에 강현우의 이름이 붙을 때마다 서지수의 걸음이 미묘하게 느려졌다.
그냥 지나가는 포스터였는데도, 서지수의 시선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나는 그 짧은 정지를 매번 놓치지 않았다.
연습실에서 강현우가 스치듯 지나가면 서지수의 활 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아주 미세한 흔들림이었다.
전공생이 아니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떨림.
하지만 나는 삼 년 동안 그 활 소리를 들어온 사람이었다.
평소의 서지수와 다르다는 걸 알았다.
한번은 학과 엠티에서 술자리 게임을 하다가 강현우의 이름이 나온 적이 있었다.
누군가 장난삼아 "서지수, 강현우 선배 어때?" 하고 물었다.
서지수는 웃으며 "그냥 선배지" 하고 넘겼다.
너무 자연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래서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그걸 애써 못 본 척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게 서지수라는 사실 하나로 만족하려 했다.
삼 년을 기다려서 얻은 자리였다.
그 자리를 스스로 흔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감으려고 애썼다.
어느 날 밤, 서지수의 방에서 우연히 낡은 노트를 발견했다.
책장 맨 아래, 다른 책들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겉표지가 낡아 색이 바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것으로 보이는 일기장이었다.
표지에는 작게 이름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손을 뻗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었다.
펼치려는 순간 서지수가 방으로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서지수는 나와 노트를 번갈아 쳐다봤다.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거 뭐 해."
서지수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처음 듣는 톤이었다.
삼 년 동안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아니, 그냥…"
"보지 마."
서지수가 성큼성큼 걸어와 노트를 빼앗아 갔다.
손이 빠르고 단호했다.
그리고 서랍에 넣고 잠갔다.
찰칵.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방 안의 다른 모든 소리를 지워버릴 정도로.
나는 그 서랍을 오래 쳐다봤다.
서지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뭐 먹을래, 배고프지 않아?"
평소와 똑같은 말투였다.
하지만 나는 그 웃음 뒤에 감춰진 무언가를 느꼈다.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나는 끝내 묻지 못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서랍은 그날 이후로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그랬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거라는 걸.
그때는 예감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