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편의점 앞, 유서연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 애는 교복 재킷을 반쯤 풀어 입은 채,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치고 편의점 유리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손에는 캔커피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그 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캔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나는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손끝에 닿은 캔은 아직 따뜻했다. 편의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다는 뜻이었다. 나를 기다리며 미리 사둔 걸까, 아니면 나올 때 두 개를 집어 든 걸까. 그런 사소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마시지 않고 그냥 손에 쥐고만 있었다.
그 애는 근처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나도 뒤따라 앉았지만, 한 사람 정도 들어갈 만한 거리를 두었다.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가 금세 흩어졌다. 캔커피를 쥔 손끝이 시렸다. 나는 그 애의 옆얼굴을 몰래 살폈다. 평소와 다르게, 화장기 없는 얼굴에 눈 밑이 조금 거칠어 보였다. 잠을 못 잔 걸까.
그 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캔을 만지작거리다가, 뚜껑을 따는 소리만 아침 공기 사이로 짧게 울렸다. 나는 그 정적이 부담스러워서 괜히 하늘을 봤다. 흐린 하늘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그 애였다.
"미안해."
그 한마디에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그 애를 쳐다봤다. 그 애는 시선을 내리깐 채 손끝으로 캔 표면의 물방울을 문지르고 있었다.
"나 때문에 힘들었지. 다 알아." 그 애가 말을 이었다. "애들이 뭐라고 하는지, 너 어제 학교 안 나오려고 한 것도."
나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왜 그랬어. 왜 받아준 거야. 그날 그냥 거절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목소리가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갔다. 후회했지만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 애는 잠깐 하늘을 봤다.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는 걸 보는 것처럼, 시선이 한참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그날, 손 떨고 있었어. 마이크 든 손이. 나 그거 봤어. 다들 웃고 있었는데, 나는 그게 웃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의 강당 조명, 사방에서 터지던 웃음소리, 마이크를 쥔 손끝의 감각이 순간 되살아났다. 손이 떨렸던 건 나만 아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애가 계속했다.
"만약 내가 거절했으면, 너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웃음거리가 됐을 거야. 방송에도 그렇게 나갔을 거고, 애들은 몇 달 동안 그 얘기만 했을 거야." 그 애는 캔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게 싫었어. 너를 좋아해서 받아준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받아준 거야."
그 말이 가슴 어딘가를 세게 눌렀다. 나는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려 애썼다.
"그럼 넌, 그럼 넌 어떡하라고. 나 때문에 너까지 이상한 소문에 휘말렸잖아."
그 애는 피식 웃었다. 웃는 건지 자조하는 건지 애매한 표정이었다.
"나는 원래도 소문 좀 있었어. 성적 때문에, 이미지 때문에." 그 애가 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근데 이건 다르지. 이건 내가 선택한 거야. 적어도 나는 내 의지로 한 거고, 너는 강요당한 거잖아. 그게 제일 억울했어."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그 애의 눈을 제대로 봤다. 평소 교실에서 보던, 흔들림 없이 보이던 눈빛 안에 사실은 피곤함과 억울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 애도 나만큼 지쳐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이 상황을 곱씹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돼." 나는 물었다. "이미 방송 나갔고, 애들은 다 우리 사귄다고 생각하는데."
그 애는 잠시 생각하다가 캔을 벤치 옆에 내려놓았다.
"일단 학교는 가자. 도망가면 더 이상해져." 그 애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대신, 우리끼리 규칙을 정하자. 남들이 뭐라 해도, 우리가 진짜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우리 얘기가 아닌 거야. 방송이 만든 이야기지, 우리 이야기는 아니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숨이 트이는 걸 느꼈다. 처음으로, 누군가 내 편에서 이 상황을 정리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젯밤부터 목을 조르고 있던 무언가가 아주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럼 오늘부터 뭐, 사귀는 척이라도 해야 되는 거야." 나는 물었다.
그 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척도 안 해." 그 애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있는 거야.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서먹하면 서먹한 대로. 남들 기대에 맞추려고 애쓰지 말자."
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뭔가 억지로 짜 맞춘 각본이 아니라, 진짜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자는 뜻처럼 들렸다. 나는 그제야 캔커피를 처음으로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씁쓸했지만, 이상하게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그 서늘한 감각이, 지금 이 순간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그 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깃을 툭툭 털었다.
"학교 가자. 늦겠다."
나는 그 애를 따라 일어섰다. 벤치에서 몸을 떼는 순간, 다리에 힘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나는 처음으로, 이 상황이 완전히 끝없는 어둠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애가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제와는 조금 다른 아침처럼 느껴졌다.
길을 걸으며 그 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색함보다는 이상한 안정감이 앞섰다. 가로수 사이로 아침 햇살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고, 등굣길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몇몇 아이들이 우리를 지나치며 흘깃거리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 애는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계속 걸었다. 나도 그 애를 따라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교문이 보이는 지점에서, 그 애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나도 따라 멈췄다. 그 애의 시선이 교문 옆 나무 뒤쪽을 향해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따라갔다.
나무 뒤에 낯익은 카메라 렌즈가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