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체육관 마이크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렸다. 나는 스탠드 조명 아래 서서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전교생이 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와 카메라를, 그리고 카메라 뒤에서 손짓하는 남자를 보고 있었다. 조명이 뜨거웠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 눈썹 끝에 매달렸다가 떨어졌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도망칠 곳을 찾고 있었다. 체육관 뒷문, 비상계단, 어디든. 그러나 다리는 이미 무대 위에 박혀 있었다.
박태현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지금이야. 지금 아니면 못 해. 그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게 응원인지 재촉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무대 아래 스태프 한 명이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 보였다. 오케이 신호였다. 나는 그게 뭘 뜻하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카메라 조수가 붐 마이크를 내 머리 위로 슬쩍 옮겼다. 그 그림자가 얼굴에 걸렸다. 나는 그 그림자마저도 나를 가두는 것 같았다.
디렉터라는 사람이 마이크를 내 손에 쥐여줬다. 강도윤 학생, 지금 이 순간이 평생 남을 청춘의 한 장면이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그대로 하면 됩니다.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계산적이었다. 무리 없으면 좋겠어요. 무리 없이. 그 말이 이상하게 목에 걸렸다. 무리가 없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무리 없이 하라는 말은 협박에 더 가까웠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뒤돌아섰다. 카메라맨에게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지시했다. 렌즈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나는 어쩌다 이 자리에 섰는지 다시 생각해봤다. 사흘 전, 박태현이 반 단체 채팅방에 올린 글 하나로 시작된 일이었다. 우리 반에서 방송 촬영한대. 응원 콘셉트로 고백 이벤트 하나 한다는데 강도윤이 딱이지 않냐. 다들 웃었다. 이모티콘이 줄줄이 달렸다. 누군가는 사진까지 합성해서 보냈다. 나는 그게 장난인 줄 알았다. 웃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날, 담임인 정민호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부르더니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말했다. 학교 홍보에도 좋고,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부담 갖지 말고. 선생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서류를 내 앞으로 밀었다. 사인만 하면 된다고 했다. 부담 갖지 말라는 말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결국 내 의사는 물어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서류에 이름을 적으면서도, 이게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
마이크를 든 손이 떨렸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바닥만 보고 있었다. 발밑 나무 바닥에 긁힌 흠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지나갔던 흔적들, 농구공이 튀었던 자국들. 그런 사소한 것들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때 무대 옆쪽 스태프가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가니 유서연이 있었다. 1학년 전체에서 성적 1등이고, 누구에게나 웃어주는 애였다. 나는 그 애와 딱히 접점이 없었다. 인사를 주고받은 적도 거의 없었다. 복도에서 몇 번 스친 게 전부였다. 그런데 각본에는, 내가 그 애를 좋아하는 걸로 되어 있었다. 누가 정했는지도 몰랐다. 아마 박태현이 던진 말이 그대로 대본이 됐을 거였다. 그 말도 안 되는 설정이 어느새 종이 위에 인쇄되고, 스태프들 손에 들려 있었다.
디렉터가 낮게 속삭였다. 컷 들어가면 바로 시작하는 겁니다. 긴장하지 말고. 카메라 세 대가 각기 다른 각도에서 나를 조준했다. 하나는 정면에서, 하나는 옆에서, 마지막 하나는 유서연을 향해 있었다. 체육관 전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조명 팬 돌아가는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까 봐 숨을 참았다.
카운트가 시작됐다. 삼, 이, 일. 붉은 불이 켜졌다.
나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유서연, 나, 너 좋아해. 나랑 사귀어줄래. 말을 하면서도 이게 내 진심인지 아니면 그저 대본을 읊는 건지 헷갈렸다. 입안이 바짝 말라서 마지막 문장은 거의 쥐어짜듯 나왔다. 체육관 여기저기서 휘파람과 야유가 뒤섞여 터졌다. 몇몇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누군가는 옆자리 친구를 팔꿈치로 찌르며 낄낄거렸다.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기대가 담겨 있었다. 거절당하는 걸 보고 싶어하는 기대.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계획은 내가 웃음거리가 되는 걸로 짜여 있었을 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나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유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눈을 감고 싶었다. 정중히 거절당하고, 다시 웃음 속에 파묻히고, 그렇게 오늘이 끝나기를 바랐다. 차라리 빨리 끝나기를, 이 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애가 마이크 앞으로 걸어 나왔다. 걸음이 서두르는 기색 없이 담담했다. 스태프가 급히 다른 마이크를 그 애 손에 건넸다. 체육관은 순식간에 다시 조용해졌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유서연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좋아. 나 그 고백, 받을게.
순간 체육관 안의 공기가 통째로 바뀌었다.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몇몇은 입을 벌린 채 서로를 쳐다봤다. 누군가는 손에 든 폰을 다시 들어 화면을 켰다. 디렉터가 카메라맨에게 뭔가 손짓했다. 나는 그 손짓이 무슨 뜻인지 나중에야 알았다. 이거다, 이 장면이다, 라는 뜻이었다. 카메라가 유서연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았다가,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다.
나는 그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유서연의 얼굴을, 흔들림 없는 그 눈빛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왜 저런 대답을 했을까. 나는 그 애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그 애도 나를 알 리가 없었다.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저런 대답을 한 걸까. 그런데 그 애는 마치 예전부터 정해둔 대답을 하듯 담담하게 웃었다. 입꼬리가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멈추는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박수와 함성이 뒤늦게 터졌다. 스태프들이 서로 얼싸안았다. 좋은 그림 나왔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디렉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니터를 몇 번이나 되돌려 봤다. 나는 그 함성 속에서 유일하게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계단 하나를 내려설 때마다 무릎이 꺾일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무대 뒤편으로 물러나면서 나는 유서연을 다시 한 번 돌아봤다. 그 애는 스태프에게 마이크를 건네고 있었다. 손짓 하나, 걸음 하나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누군가 그 애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걸었지만 표정은 그대로였다. 나는 그 무표정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내 이름 뒤에는 항상 유서연이라는 이름이 따라붙게 됐다. 복도에서, 급식실에서, 심지어 학원 가는 길목에서도 사람들은 나를 볼 때마다 그 애 이름을 먼저 떠올렸다. 나는 그게 얼마나 큰 무게였는지, 그때는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