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딸랑, 하는 소리도 없이 복도 창문이 살짝 열려 있었던지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의 복도는 인적이 드물었고, 태오와 나 둘뿐이었다.
"대답 안 해?" 태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깔렸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태오의 얼굴 반쪽을 비추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유독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결국 짧게 대답했다.
"사귀는 거 아니야."
그 한마디를 뱉어내는 데 며칠이 걸린 셈이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 말을 어떻게 꺼낼지 연습했었다. 그런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온 문장은 연습한 것보다 훨씬 짧고 허무했다.
태오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러고는 미간에 힘이 들어가면서 눈썹 사이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뭐? 그럼 그날 왜 그런 말을 한 건데."
나는 손끝으로 안경다리를 매만지며 겨우 입을 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아가 너 좋아한다고 했어. 근데 갑자기 네가 나타났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렇게 말해버렸어." 말을 뱉는 동안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목덜미까지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유치한 실수를 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태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창밖을 한 번 흘긋 보더니,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그동안 서아는 뭐가 됐냐. 자기 마음도 제대로 말 못 하고, 니 거짓말 때문에 나한테 이상한 애처럼 보이고."
그 말이 정확히 가슴에 꽂혔다. 마치 누군가 명치를 세게 누른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신발 코끝을 내려다보며 발끝으로 바닥의 타일 선을 따라 그리듯 문질렀다.
"…미안해." 겨우 그 말만 흘러나왔다.
태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종이 울려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이불 속에 누워서도 태오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서아는 뭐가 됐냐. 그 문장이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자꾸만 서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엔 웃음이 많은 애였는데, 그날 이후로 나를 볼 때마다 어색하게 웃던 그 얼굴이.
다음 날, 나는 서아를 찾아가 사실대로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을 하고도 교실 문 앞에서 몇 번이나 손을 들었다가 내렸는지 모른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서 땀이 났다.
방과 후 텅 빈 교실, 서아는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이 서아의 옆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펼쳐놓은 채 읽지도 않은 것 같은 노트가 놓여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서아야."
서아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발견하자 표정이 살짝 굳는 게 보였다.
"태오한테 사실대로 말했어. 우리 사귀는 거 아니라고."
서아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놀란 듯, 그러면서도 어딘가 불안한 듯한 눈빛이었다.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이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럼 이제…… 태오가 나 어떻게 볼까." 서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손가락으로 노트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상한 애로 보겠지. 자기 마음도 제대로 말 못 하고 남한테 거짓말이나 시키는 애로."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내 잘못이었으니까. 창밖에서 축구공 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미안해." 겨우 그 한마디를 내뱉었을 때, 서아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는 표정이었다.
"너는 진짜, 사람 마음이라는 걸 하나도 모르는구나."
그 말이 예상보다 훨씬 아프게 다가왔다. 마치 뾰족한 것에 손끝을 찔린 것처럼, 순간적으로 숨이 멎었다.
"연애는 언젠가 끝난다고, 우정이 더 중요하다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 그게 얼마나 무례한 건지 알아?"
나는 순간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게 사실이잖아. 연애는 오래 못 가. 근데 태오랑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친구야. 그런 관계가 더 확실한 거 아니야?"
말을 뱉으면서도 내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교실 안의 정적 속에서 내 목소리만 유독 크게 울렸다.
서아의 눈에 순간 물기가 차올랐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서 내 감정은 그렇게 함부로 판단해도 되는 거야? 확실하지 않으니까 존중받을 필요도 없다고?"
목소리가 떨리다가 결국 갈라졌다.
"나는…… 나는 그냥 내 마음을 태오한테 직접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근데 너 때문에 그 기회조차 없어졌잖아."
그 순간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교실 안을 무겁게 채웠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운동장의 소음만이 유일한 소리였다. 누군가의 웃음소리, 축구공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하교 안내 방송까지도 지금 이 순간과는 너무 멀게 느껴졌다.
서아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에는 원망과 실망이 뒤섞여 있었다.
"됐어." 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짧게 말했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제 알겠어. 너한테는 이런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서려는 서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뭔가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손끝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서아야." 겨우 이름을 불렀지만, 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 소리가 텅 빈 교실 안에서 몇 번이나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노을이 완전히 사그라들고 교실 안이 어둑해질 때까지, 다리가 풀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운동장에는 어느새 아무도 없었다.
서아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자꾸만 귓가에서 되풀이됐다. 너한테는 이런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그 말이 맞는 걸까. 정말 나는 아무렇지 않은 걸까.
그렇게 자문하는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기엔, 가슴 한쪽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그 아픔의 이유를 나는 아직 제대로 알지 못했다.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서는데, 복도 저편에서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태오였다. 나를 발견한 태오의 표정이 순간 이상하게 굳었다.
"너, 방금 서아랑 무슨 얘기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