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너만 모르는 봄날의 약속

5화

월요일 아침,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 준호는 뭔가 달라져 있다는 걸 느꼈다. 평소라면 창가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을 텐데, 오늘따라 반 아이들의 시선이 유독 그와 서린 사이를 오가는 것 같았고, 그 미묘한 공기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서린이 준호의 자리 근처를 오가는 일이 눈에 띄게 잦아졌는데, 사물함을 정리하러 가는 척하며 그의 책상을 지나치거나, 칠판 지우개를 가지러 가면서도 굳이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식이었고, 그때마다 준호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노트에 적힌 글씨를 다시 읽는 척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그런 시선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급식판을 든 서린이 멀리서 그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준호는 몇 번이나 목격했고,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조여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감정의 이름을 정확히 붙일 수는 없었다. 그 미묘한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다름 아닌 하늘이었다. "야, 강서린 요즘 너 진짜 좋아하는 거 아냐?" 그녀가 급식판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장난스레 묻자, 준호는 마시던 물이 잘못 넘어간 듯 사레들려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무슨 소리야, 그냥... 예전에 아는 사이였나 봐." 그의 어색한 대답에 하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위아래로 관찰하듯 훑어보았다. "흐음, 아는 사이라." 그녀가 턱을 괴며 중얼거리더니, 곧 무언가 재밌는 걸 발견한 사람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넌 기억 못 한다는 거지?" 그녀의 물음에 준호는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순간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밀려오는 답답함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왜 나만 기억이 없는 거지.' 그는 젓가락 끝으로 밥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속으로 되물었고, 그 물음은 오늘 하루 종일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예정이었다. 하늘은 더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지만, 준호는 밥을 먹는 내내 서린이 앉은 테이블 쪽으로 시선이 자꾸 향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 같은 날 오후, 자율학습 시간. 교실 안은 조용했고, 창밖으로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운동장 위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준호는 펼쳐놓은 문제집 위로 시선을 두었지만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고개를 들어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다가, 그의 눈이 한 지점에서 멈춰버렸다. 운동장 너머 정문 앞, 교복을 입지 않은 남학생 하나가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멀리서 봐도 낯익은 얼굴이었는데, 예전 중학교 때 그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선배, 지금은 다른 학교 명찰을 달고 있었지만 그 각진 턱과 비스듬히 기울어진 입매만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었다. 준호의 손끝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굳었고, 펜을 쥐고 있던 손가락 사이로 서늘한 감각이 스며들듯 번져나갔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냉기가 오래전 봉해두었다고 생각했던 상처를 정확히 건드렸고, 그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는 걸 준호는 그제야 실감했다. '저 사람이 여기 왜.'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고, 목덜미에서부터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주변 아이들이 문제를 풀며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내는 그 평화로운 교실 안에서, 준호만은 전혀 다른 시간 속에 갇혀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애써 시선을 거두고 다시 문제집으로 눈을 돌렸지만,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아챌 수 있었다. *** 수업이 끝나고 복도를 걷던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서둘렀다.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신발장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빠르고 불규칙했는데,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 뒷모습을 발견한 서린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무슨 일 있어? 얼굴이 하얗게 됐는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걱정이 담겨 있었고, 가까이서 마주한 준호의 안색은 실제로 창백해 보였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준호가 애써 웃어 보였지만, 그 미소가 입가에만 걸린 채 부자연스럽게 굳어 있다는 걸 서린은 놓치지 않았다.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재차 물으며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자, 준호는 그 시선을 피하듯 신발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네, 그냥... 좀 피곤해서요." 그의 목소리 끝이 살짝 흔들렸고, 서린은 더 캐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준호가 서둘러 신발을 갈아 신고 자리를 뜨는 바람에 그럴 틈이 없었다. 정문을 나서면서 준호는 다시 한번 그 자리를 살폈지만, 다행히도 그 남학생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한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 그날 밤, 준호는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다. 좁은 골목 안, 사방이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 있는 그곳에서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있던 중학교 시절의 자신이 보였고, 발길질이 옆구리를 파고들 때마다 터져 나오는 비웃음 소리, 그리고 그 소리들 사이로 아무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던 그 순간의 서늘한 공기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야, 이준호. 도망도 못 가겠으면 그냥 엎드려." 낮고 비틀린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고, 꿈속의 준호는 온몸이 굳어버린 채 그저 바닥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잠에서 깬 준호는, 어둠 속에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불을 움켜쥔 손이 땀에 젖어 있는 걸 느끼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심장은 여전히 거칠게 뛰고 있었고, 방 안의 정적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질 만큼 그의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지.' 어둠 속에서 되뇌는 그 생각이, 오늘 낮에 본 그 얼굴과 겹쳐지며 그의 마음을 계속 갉아먹었고, 준호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한동안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한 그는 결국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고, 곧 다가올 아침이 두려워지는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 다음 날 등굣길.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준호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집을 나섰는데, 정문 앞에 다시 그 남학생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의 걸음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그 남학생이 준호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 여유로운 움직임 하나하나가 마치 사냥감을 확인하는 포식자의 몸짓처럼 준호의 눈에 각인되었다. "오랜만이네, 이준호." 낮고 비틀린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준호의 온몸이 얼어붙듯 굳어버렸고,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너... 여긴 왜." 겨우 짜낸 목소리가 자신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떨리고 있었다. "왜, 반갑지 않아?" 남학생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한 걸음 더 다가섰고, 그 거리감에 준호는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에서, 마침 등교하던 서린이 두 사람의 대화를 정확히 듣게 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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