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너만 모르는 봄날의 약속

4화

금강옥을 나서는 길,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고 가로수 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서늘한 냄새를 실어왔다. 문을 나서기 직전까지 할머니는 두 사람의 손을 번갈아 잡으며 놓지 못했는데, "새 아가, 새 아가, 다음엔 꼭 밥 먹으러 와" 하는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아서 서린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가게 유리문에 붙은 낡은 종이 흔들리며 딸랑거리는 소리가 등 뒤로 멀어질 때까지, 서린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린과 준호는 나란히 버스정류장까지 걸었는데, 그 거리가 평소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고,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 소리마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준호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빼고, 다시 넣기를 반복하며 걸었는데, 그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서린의 시선이 자꾸 따라붙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할머니 말씀, 다 믿는 건 아니지?" 서린이 불쑥 물었고, 준호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섞여 있지 않아서, 서린은 순간 그 담백함에 당황할 정도였다. "믿어요. 할머니가 왜 거짓말을 하시겠어요." 그의 대답이 뜻밖에 담백해서, 서린은 순간 말을 잃었다.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어와 그녀의 앞머리를 흩트려놓았고, 그녀는 그 틈을 빌려 시선을 잠깐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냥,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얘기라고 생각할까 봐."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낮게 갈라졌는데, 그건 준호가 처음 듣는 서린의 약한 어조였다. 준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었고, 그 침묵이 길어질까 봐 서린이 먼저 다시 걸음을 뗐다. 그 순간 골목에서 자전거 한 대가 빠르게 튀어나왔고, 벨소리도 없이 튀어나온 그 속도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준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서린이 그의 팔을 확 잡아끌었다. "위험해." 그녀가 짧게 내뱉은 말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가깝게 붙었는데, 서린의 손이 그의 팔뚝을 붙잡은 채로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자전거는 아무렇지 않게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고, 그 뒷모습을 향해 욕이라도 한마디 뱉고 싶었지만 서린의 신경은 온통 자기 손끝에 쏠려 있어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소리가 준호의 귓가에 울렸고, 그 온기가 옷을 통해 스며드는 감각이 낯설게 남았다.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그는 그 감각의 정체를 알 수 없어 괜히 자전거가 사라진 골목 쪽을 오래 바라보았다. "고, 고마워요." 그가 겨우 뱉은 말에, 서린은 뒤늦게 손을 놓으며 시선을 피했는데, 그녀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에 아직 남아 있는 그의 팔뚝의 온도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옷매를 괜히 한 번 털었다. "됐어. 별거 아니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그 말투 뒤에 숨겨진 미세한 동요를 준호는 처음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아까와는 다른 침묵이 그 사이에 놓였고, 서로의 팔이 스칠 듯 가까워질 때마다 준호는 괜히 반보씩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정류장이 보이자 서린이 먼저 걸음을 서둘렀고, 준호는 그 뒷모습을 따라가며 그녀의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빠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서린은 문득 물었다. "박하늘이랑 되게 친하더라." 그 질문의 온도가 이상하게 서늘했다. 준호는 그 질문의 무게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벤치 옆에 놓인 안내판을 무심히 훑어보며 대답했다. "네, 옆자리니까요. 밝고 재밌는 애예요." 준호가 별생각 없이 대답하자, 서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살짝 오므렸다가 다시 펴며, 그 미세한 동작으로 자신의 감정을 눌러 담았다. "그렇구나." 짧은 대답 뒤로 이어진 침묵이 평소보다 길게 늘어졌는데, 준호는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멀리서 버스가 다가오는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서린은 오히려 말을 아꼈다. "저기,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준호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서린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야. 버스 온다." 그녀의 짧은 대답이 그 질문을 덮어버렸고, 준호는 더 묻지 못한 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버스가 도착하고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을 때, 서린은 창밖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창문에 서린 입김이 번졌다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입을 뗐다. "나도... 그렇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말이 혼잣말처럼 흩어졌지만, 준호의 귀에는 또렷하게 박혔다. '저 말은 무슨 뜻이지.' 그는 되묻고 싶었지만, 서린이 다시 표정을 굳히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버스가 정류장 세 곳을 지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고, 그 정적이 오히려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가장 시끄러운 시간이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서린의 어깨가 준호의 어깨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는데, 그 미묘한 거리감이 두 사람 사이의 새로운 공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준호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세듯 바라보다가, 문득 서린의 옆얼굴을 힐끔 훔쳐보았고, 그녀의 시선이 여전히 창밖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류장 안내음이 울릴 때마다 서린은 몸을 살짝 움찔했는데, 그건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칠까 봐서가 아니라, 그 짧은 순간마다 준호와의 거리가 새삼 의식되어서였다. 집 앞에 도착해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서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준호는 오늘 하루 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낯선 감정을 겪었는지 헤아려보려 했지만,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그녀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준호는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고, 가로등 불빛 아래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곱씹었다. '박하늘 얘기가 왜 그렇게 신경 쓰였을까.' 그는 그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한 채, 서린이 사라진 골목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밤, 잠들기 전 휴대폰 화면에 뜬 서린의 이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준호는 결국 아무 말도 보내지 못하고 화면을 어둡게 꺼버렸는데, 그 짧은 망설임 속에 자신도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조용히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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