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버림받은 영애의 약초밭

2화

평민학당의 첫날은 낯선 냄새로 시작되었다. 종이 냄새와 흙 냄새가 뒤섞인 교실 안에는 십수 명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이 나보다 두세 살은 어려 보였다.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라니.' 귀족가의 딱딱한 문양 대신 낡은 나무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의자는 삐걱거렸고 책상 표면에는 누군가 새겨놓은 낙서들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짝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욕설을 새겨놓았다. 칠이 벗겨진 자리마다 손때가 묻어 반질거렸다. 이 책상을 거쳐 간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 모였다가 곧 흩어졌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귀족가의 버려진 딸이라는 이야기가 벌써 퍼진 모양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아이 하나가 나를 흘끔거리다 옆 아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쟤가 그 집 딸이래." "몰라, 아무튼 이상해." 들으라는 듯 흘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못 들은 척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런 시선쯤은 익숙해질 각오를 하고 온 곳이었다. 교실 앞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 첫 수업은 예상과 달리 약학이었다. 교사는 자신을 윤도현이라 소개했다. 카라멜색 머리에 은테 안경을 쓴 젊은 남자였다. 푸른 눈이 유난히 맑았다. 옷차림은 수수했지만 소매 끝이 낡지 않고 깔끔했다. 손톱은 짧게 정돈되어 있었고 손끝에는 옅은 갈색 얼룩이 남아 있었다. 약초를 자주 만지는 사람의 손이었다. "오늘은 마른 약초의 상태를 감별하는 법을 배워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몇몇은 지루한 듯 하품을 했고, 몇몇은 눈을 반짝였다. 책상마다 마른 풀뿌리 몇 가닥이 나뉘어 놓였다. 색이 조금씩 다르고 냄새도 조금씩 달랐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습기를 너무 많이 먹었다.' 그런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어디서 배운 적도 없는 지식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이 감각이 어디서 온 것인지 스스로도 짐작할 수 없었다. 혹시 전생의 기억인가. 하지만 그런 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그 뿌리를 조심스럽게 쪼개보았다. 안쪽 색이 겉과 미묘하게 달랐다. 겉은 짙은 갈색이었지만 속은 희끄무레했다. 정상적인 뿌리라면 겉과 속의 색이 거의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이것도 어디서 배운 지식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약효가 떨어졌을 겁니다."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오자마자 나조차도 당황했다. 주변 아이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몇 명은 대놓고 눈을 크게 떴고, 몇 명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뭐야, 쟤 뭔데 저래?"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윤도현 선생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지?" 그의 질문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도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손끝에서 느껴졌다.' 그렇게 답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답했다간 오히려 더 이상하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교실 안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색이랑, 향이 조금 다른 것 같아서요." 나는 겨우 그렇게 둘러댔다. 선생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맞습니다. 습기에 노출된 약초는 유효 성분이 손상됩니다." 그가 다른 뿌리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뿌리는 채취 시기가 늦었고, 저 뿌리는 건조 과정에서 온도가 너무 높았다고 설명했다.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마치 예전에 배운 것을 다시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설명을 듣기 전에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나는 이 학당에 오기 전까지 약학이라는 단어조차 낯설었다. 귀족가에서 배운 것은 자수와 예법, 그리고 웃는 법뿐이었다. 약초의 이름 하나도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왜 손끝은 이렇게 확신하고 있는 걸까. 수업이 이어지는 내내 나는 다른 뿌리들을 하나씩 만져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비슷한 느낌이 스쳤다. 이건 벌레 먹은 자국이 있다. 이건 채취한 지 얼마 안 됐다. 이건 뿌리가 아니라 줄기의 일부다. 설명하기 힘든 확신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애써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한 번으로도 충분히 눈에 띄었으니까. 수업이 끝난 뒤 나는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그 감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마른 흙과 풀 냄새가 손에 배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냄새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편안했다. 낯선 냄새인데도 이상하게 몸에 익숙한 냄새였다. '이 재능이, 정말 나에게 있는 것일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오랜만에 무언가 가슴 안쪽이 미세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두려움인지, 기대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버려진 딸이라는 낙인 말고, 처음으로 무언가 다른 이름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생각이 낯설고, 동시에 조금은 달콤했다. 교실을 나서는 길에 윤도현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짧게 목례만 했다. 하지만 그 시선에는 분명한 관심이 담겨 있었다. '저 선생, 뭔가 더 알고 있는 얼굴인데.'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창밖으로 붉은 저녁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며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낡은 담벼락 위로 저녁 까마귀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불길한 징조인가.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날 밤, 오봉수 집사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목소리도 평소와 달리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문틀에 선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표정에서 무언가 좋지 않은 소식을 직감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또 무슨 일이지.' 오봉수 집사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한 채,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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