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숨었더니 자매가 쫓아온다

3화

학교가 끝나고 신발장 앞이었다. 복도를 가득 채운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나는 실내화를 벗어 넣고 운동화를 꺼냈다. 끈을 묶으려고 허리를 숙이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조용한 발소리였다. 마치 소리를 죽이는 법을 아는 사람처럼. 허리를 펴고 돌아보니 장유나가 서 있었다. 은발 숏컷이 저녁 햇살에 반짝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주황빛이 그 애의 옆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는데, 정작 표정은 그 온기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담담했다. 마치 감정이라는 걸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뭐." 짧게 물었다. 목소리에 날이 섰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유나는 대답 대신 나를 빤히 바라봤다. 시선이 오래 머물러서 불편했다. 눈을 피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그 시선을 먼저 거둘 수가 없었다. "언니가 못 찾아도 괜찮대."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뭐가." 신발장 문을 닫으며 물었다. 손끝이 차가운 철제 문에 닿았다. "이름. 언니는 알아내면 좋고, 몰라도 상관없대. 근데 나는 상관있어." 손끝이 신발주머니 끈을 만지작거렸다. 그 애의 말투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냥 사실을 나열하는 것 같았다. 날씨를 말하듯이. 오늘 급식 메뉴를 말하듯이. "왜 상관있는데." "모르겠어." 유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동작이 인형처럼 부드러웠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나. 자꾸 떠올라. 이게 뭔지 모르겠어." "...뭐라는 거야."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관심이라는 거 알아. 근데 이게 연애 감정인지, 그냥 궁금한 건지 구분이 안 돼." 순간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주변 학생들이 신발장 근처를 지나가다 힐끔거렸다. 누군가는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봤다. 저 멀리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그 애 아니야. 장유나가 왜 말을 걸어. 나는 그 시선들이 살갗에 박히는 것 같았다. "저기." 말을 끊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름 알려주면 안 돼?" 유나가 한 발짝 다가섰다. 거리가 좁아졌다. 그 애의 향수 냄새인지 비누 냄새인지 모를 옅은 향이 순간 코끝을 스쳤다. 뒤로 물러나려는데 신발장 모서리에 등이 닿았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등 뒤로 딱딱한 철제 모서리가 느껴졌고, 앞으로는 유나의 무표정한 얼굴이 있었다. "싫어." "왜." "그냥 싫어." "나도 그냥 좋은 것 같은데."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가 훅 들어왔다. 마치 예고 없이 던진 돌멩이처럼.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화가 나야 하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 그게 더 불편했다. 오히려 얼굴이 화끈거렸고, 그 열기가 못마땅했다. "나 갈게." 서둘러 몸을 틀고 걸음을 옮겼다. 가방끈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등 뒤로 유나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도망가지 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이 더 빨라졌다. "나 계속 찾을 거야." 그 말이 등에 박히는 느낌이었다. 마치 화살처럼, 걸음을 옮길수록 더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 집으로 가는 골목은 어제와 다른 길로 돌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큰길을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면 조금은 안전할 것 같았다. 담벼락 사이 좁은 길로 접어드는데 발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번엔 또 누구야. 숨을 고르며 천천히 돌아섰다. 돌아보니 구윤재였다. 헐레벌떡 뛰어와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야, 한도영. 잠깐만."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뭐야. 뛰어온 거야?" "어. 너 찾으려고 골목골목 다 뒤졌잖아." "뭔데." "급식실에서 소문 다 났어. 장서윤, 장유나가 너 찾는다고. 근데 이제 걔네 둘 다 너한테 관심 있다는 얘기까지 돌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관심 없다고 전해." "내가 전할 위치가 아니잖냐. 근데." 구윤재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갑자기 낮아진 그 톤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너 진짜 걔들 구해준 거 맞지? 그 자매, 부모님이 좀 큰 회사 하신다는 소리도 있고. 뭐 확실친 않은데, 만만한 집 애들이 아니래."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큰 회사라는 말이 이상하게 걸렸다. 유명인이라는 말, 학교 최고의 관심 대상이라는 말이 다시 겹쳐졌다. 며칠 전 우연히 골목에서 두 자매를 도와줬을 뿐인데, 그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 "관심 없다니까."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정말로 그렇게 되뇌고 싶었다. "알겠어, 알겠어. 근데 너도 이제 안 관심 없을 거다. 걔들이 안 놔줄 것 같은데." 구윤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고 반대편으로 갔다.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혼자 남은 골목에서, 나는 잠시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숨이 가빴다.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정리가 되지 않았다. 유나의 그 무표정한 얼굴, 도망가지 말라던 목소리, 그리고 구윤재가 전해준 소문까지. 이대로 조용히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 예감이 이상하게 정확할 것 같아서, 걸음을 옮기는 발이 무거웠다. *** 밤이 되어 방에 들어와 불을 끄려는데, 창밖에서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낮은 엔진 소리. 어제와 같은 소리였다. 손이 저절로 스위치에서 떨어졌다. 나는 잠시 그대로 서서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낮게 웅웅거렸다. 창문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젖혔다. 골목 어귀에 검은 세단 한 대가 멈춰 있었다. 헤드라이트는 꺼져 있었다.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는 짙은 필름이 붙어 있어서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제는 지나가는 차인 줄 알았다. 오늘은 아니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정확히 같은 위치, 같은 방향으로.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확했다. 나는 커튼을 다시 닫았다.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낮게 두근거렸다.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뇌었다. 애써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자꾸만 그 검은 세단의 형체가 눈앞에 떠올랐다. 혹시 그 자매와 관련이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 아무 상관없는, 그저 우연히 겹친 차일 뿐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그 낮은 엔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듯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로. 그날 밤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눈을 꼭 감아도 소용없었다. 그 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도, 창밖의 그 차는 조용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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