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지훈아!"
한소율이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볕에 그은 뺨이 발갰다. 신발 끝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유리병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훈은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뭘 또 잡았어."
"이거 봐, 색이 진짜 예뻐."
소율은 유리병을 지훈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녹색과 자주색이 섞인 무언가가 안에서 다리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디가 여러 개 겹쳐진 다리였다. 등에는 작은 돌기가 촘촘히 나 있었고, 병 벽에 닿을 때마다 미끈한 점액이 자국으로 남았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반걸음 물러섰다.
"이런 건 어디서 잡았어."
"숲 초입에서."
소율의 눈매는 수양버들처럼 처져 있어서, 늘 무해한 인상을 주었다. 순한 얼굴, 부드러운 목소리. 유년기부터 지훈과 함께 자란 친구였다. 하지만 그녀의 취향은 그 인상과 정반대였다. 지훈은 원작 게임 속에서 이 이름을 본 기억이 있었다.
한소율. 다수의 루트에서 사망하는 조연 캐릭터.
어떤 루트에서는 숲에서, 어떤 루트에서는 폐허에서. 사인은 늘 비슷했다. 위험 지역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해 마수와 마주쳐 죽는다는 설정. 게임 텍스트는 짧고 건조했지만, 지훈은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었다. 화면 속 텍스트 창에는 그저 한 줄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한소율, 사망. 그게 다였다. 죽음의 무게가 그렇게 가벼워도 되는 건지,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그 인물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병 속의 벌레를 바라보며 정말로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숲 초입이라니. 위험하지 않아."
"괜찮아. 얕은 곳까지만 갔어."
"얕은 곳이라도 위험할 수 있어."
소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순수한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너 좀 이상해졌다."
"뭐가."
"예전엔 이런 거 보면 소리부터 질렀잖아. 병아리처럼 팔짝팔짝 뛰면서."
지훈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예전의 강지훈은 벌레를 싫어했다. 어쩌면 그것도 게임 텍스트에 남아 있을 정보였을지 몰랐다. 사소한 설정 하나까지 몸에 새겨진 것처럼 따라붙는 게, 가끔은 소름 끼치도록 이상했다. 지훈은 소율의 손에서 유리병을 슬쩍 밀어냈다.
"됐고, 요즘도 숲에 자주 가?"
"응. 재밌는 게 많거든."
"재밌는 게 뭔데."
소율은 병을 소중히 감싸안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비밀을 나누듯,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저번 주에는 이상한 걸 봤어."
지훈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뭘 봤는데."
"숲 안쪽 바위에 이상한 흔적이 있었어. 나무가 통째로 얼어 있는 것처럼 하얗게 변해 있고, 땅에는 엄청 큰 발자국이 있었어."
지훈은 목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침을 삼켰지만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발자국이 얼마나 컸는데."
"이만큼."
소율이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성인 남자 키만 한 크기였다. 그녀의 팔 끝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지훈의 머릿속에서 뭔가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지훈의 머릿속에서 게임 텍스트 하나가 떠올랐다. A급 마수, 마골. 곰의 몸통에 용의 두부를 지닌 거대한 마수. 특유의 청백색 브레스가 닿은 자리는 순간적으로 결빙된다는 설정이었다. 게임 화면 속에서 마골은 거대한 앞발 한 번으로 나무를 통째로 쓰러뜨렸다. 그 브레스에 닿은 병사들은 그대로 얼음 조각처럼 굳어 부서졌다.
나무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는 것. 그것은 브레스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원작 타임라인에서 마골은 훨씬 나중에, 지훈이 스무 살이 넘어서야 등장하는 존재였다. 지금은 그가 열다섯 살이었다. 아직 오 년은 더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그 흔적이 이미 숲에 있었다.
"소율아."
"응?"
"그 자리, 다시 가지 마."
소율은 고개를 갸웃했다. 병 안의 벌레가 그 움직임에 맞춰 다리를 꿈틀거렸다.
"왜? 재밌었는데."
"위험할 수 있어."
"뭐가 위험한데. 큰 짐승 발자국이었을 뿐이야."
"큰 짐승이 아니라 마수일 수도 있어."
소율은 잠시 침묵했다. 눈동자가 반짝, 빛을 냈다. 그러다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더 재밌잖아."
지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마수를 직접 보는 거, 나 계속 궁금했었어. 게 안 뭐가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책에서만 읽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잖아."
"소율아, 그건 목숨을 걸 만한 일이 아니야."
소율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웃음기가 걷힌 얼굴은 낯설 정도로 단단했다.
"너 진짜 요즘 이상해. 예전엔 나랑 같이 숲에 벌레 잡으러 다녔잖아. 그때는 재밌다고 했잖아."
"그건 벌레였고, 지금 얘기하는 건 A급 마수야."
"A급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지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원작 게임 지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지훈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그냥, 그런 큰 발자국을 남기는 건 위험한 것들뿐이야."
소율은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지훈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너 뭔가 숨기는 거 있지."
지훈의 심장이 덜컥했다.
"없어."
"거짓말."
"진짜 없어."
소율은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병 속의 벌레가 다시 한 번 다리를 꿈틀거렸다.
"알겠어. 그럼 그 자리엔 안 갈게."
지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소율의 다음 말이 그 안도를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대신 내일 숲 반대편 늪지대에 가볼 거야. 거긴 더 신기한 게 있대."
"늪지대?"
"응. 발광하는 이끼가 있다던데. 밤에 보면 초록색으로 빛난다고 마을 사람들이 그랬어."
지훈은 원작 지식을 뒤졌다. 늪지대라는 지명은 언뜩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골의 서식지가 정확히 어디인지, 지훈은 확신할 수 없었다. 게임 속에서도 마골의 이동 경로는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저 숲 전역을 배회한다는 짧은 설명뿐이었다. 발자국이 발견된 곳이 숲 초입이라면, 마골의 이동 범위 안에 늪지대가 포함될 가능성도 있었다.
"소율아, 늪지대도 위험할 수 있어."
"거긴 마수 발자국 같은 거 없었어. 걱정 마."
"아직 없는 거지, 없다는 보장은 없어."
소율은 유리병을 흔들며 웃었다. 벌레가 병 안에서 몸을 뒤집었다.
"너 진짜 걱정이 많아졌다. 예전엔 이런 거 신경도 안 썼는데. 오히려 내가 너 걱정하느라 바빴는데."
그녀는 손을 흔들며 대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훈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유리병 속 벌레의 다리가 마지막으로 꿈틀거리던 모습이 눈앞에 계속 남아 있었다.
원작에서 한소율이 죽는 루트의 배경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위험 지역에 대한 경각심 없이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 재미와 흥미가 두려움을 앞서는 성격. 그 성격은 이 세계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지훈은 저택으로 돌아가 서예린을 찾았다. 발걸음이 자연히 빨라졌다.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마골의 흔적이 이미 숲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소율이 그 근처를 얼쩡거리고 있다는 것을.
서재로 향하는 복도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스치는 나무들의 그림자가 순간순간 발자국처럼 커 보였다.
서예린은 서재에서 오래된 지도를 살펴보고 있었다. 촛불 아래 지도의 갈피가 누렇게 바스라져 있었다. 지훈이 들어서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선생님, 숲에 이상한 흔적이 있대요."
서예린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어떤 흔적인가요."
"나무가 하얗게 얼어 있고, 발자국이 사람보다 훨씬 커요."
서예린은 지도를 접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톱 끝이 지도 모서리를 꾹 눌렀다.
"누가 봤나요."
"제 친구가요."
서예린은 잠시 침묵했다. 촛불이 흔들리며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흔적이 있던 곳, 정확히 어디인지 알아요."
지훈은 소율에게 들은 위치를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숲 초입, 바위, 하얗게 변한 나무들. 서예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펜을 쥔 손이 지도 위에 위치를 표시하는 동안, 그녀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늘어졌다.
"내일 그곳에 가봐야겠어요."
"저도 같이 갈게요."
서예린이 고개를 저었다.
"위험할 수 있어요."
"제가 알아야 할 정보일 수도 있어요."
서예린은 지훈을 오래 바라보았다. 촛불 그림자가 그녀의 눈가에 일렁였다. 그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지만 제가 하는 말은 반드시 따르세요."
"네."
"단 한마디도 어기면 안 돼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다른 걱정이 자라나고 있었다. 만약 그 흔적이 정말 마골의 것이라면, 원작보다 몇 년이나 이른 등장이었다. 이 세계는 지훈이 알던 게임과 이미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어디까지 달라진 것인지, 그 끝이 어디인지 지훈은 짐작할 수 없었다.
서예린이 지도를 다시 펼쳤다. 손가락이 숲의 경계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이 근방에 마을이 몇 개 있죠. 늪지대까지 포함하면."
지훈의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늪지대도 위험하다고 생각하세요?"
"확실하지 않아요. 하지만 마골 같은 존재는 서식지를 넓게 잡는 편이에요. 배가 고프면 더 멀리 나가기도 하고요."
지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소율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일 늪지대에 간다던 그 목소리, 그 웃음. 발광하는 이끼를 보러 간다던 들뜬 표정.
"선생님, 제 친구가 내일 늪지대에 간대요."
서예린의 시선이 지훈에게 고정됐다.
"막았나요."
"막으려고 했는데... 완전히 막지는 못했어요."
서예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눈빛에는 결심이 담겨 있었다.
"그럼 숲을 살피기 전에, 늪지대 쪽도 사람을 보내야겠어요."
"제가 갈까요?"
"아니요. 당신은 저와 함께 흔적을 보러 가요. 늪지대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죠."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사람을 보낸다 해도, 소율이 그 말을 얼마나 들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위험을 경고받을수록 오히려 흥미를 느끄는 쪽에 가까웠다.
그날 밤, 지훈은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있어도 눈이 감기지 않았다. 천장의 나뭇결이 어둠 속에서 이상한 무늬처럼 보였다. 창밖의 어둠 속에서, 숲이 있는 방향을 오래 바라보았다.
바람이 창틀을 흔들 때마다, 어디선가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실제로 들리는 소리인지, 그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상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청백색으로 얼어붙은 나무들. 사람 키만 한 발자국. 그 이미지가 눈을 감을 때마다 어둠 속에서 되살아났다.
지훈은 몸을 뒤척였다. 소율의 웃는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병 속에서 꿈틀거리던 벌레의 다리처럼, 불안이 가슴속에서 계속 꿈틀거렸다.
내일, 숲의 흔적을 확인하러 간다. 그리고 소율은 늪지대로 향할 것이다. 두 방향 모두 안심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무언가 이미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확신이 지훈의 마음속에 짙게 깔려 있었다.
원작에는 없던 시간에 나타난 마골. 그 존재 하나만으로도, 이 세계가 지훈이 알던 이야기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소율의 죽음이라는 결말도, 이미 정해진 대로 흘러갈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찾아올 것인가.
지훈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마음속 불안은 그 밤이 다 지날 때까지 가라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