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는 엔딩은 바꾸기로 했다

2화

서예린은 정원 한가운데 섰다. 아침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시각이었다. 저택 뒤뜰의 잔디는 이슬에 젖어 있었고, 발밑에서 축축한 감촉이 올라왔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빛이 서예린의 어깨 위에 얼룩무늬를 그렸다. 지훈은 목검을 고쳐 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나무의 결이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낯설었다. 눈앞의 여자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런데도 지훈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선이 마주쳤다. 서예린의 녹색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덤벼보세요." 서예린이 말했다. 지훈은 원작 지식을 떠올렸다. 서예린이라는 이름은 게임 텍스트 어딘가에 짧게 언급되어 있었다. A급 모험가 출신. 엘프 혈통. 검술 실력은 상급 이상. 하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스킬창 어디에도, 도감 어디에도 그녀의 이름이 자세히 실려 있지 않았다. 서브 캐릭터. 조력자 NPC. 게임에서는 그렇게 분류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어떤 스킬을 쓰는지, 어떤 패턴으로 움직이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몸으로 부딧혀보면 뭔가 알 수 있을 거라고. 지훈은 목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검이 허공을 갈랐다. 바람 소리가 났다. 그것뿐이었다. 서예린의 몸이 흐릿하게 움직였다. 지훈의 검끝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를 벤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지훈의 손목이 붙잡혔다. 차가운 손이었다. 손아귀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목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무가 땅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끝났네요." 서예린이 말했다. 그녀의 손이 지훈의 손목을 놓았다. 지훈은 뒤로 물러서며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폐가 타는 것 같았다. "다시." 지훈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서예린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보통은 이쯔음에서 그만두던데요." "다시 하겠습니다." 서예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그의 얼굴을, 그리고 떨리는 손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다시 목검을 집어 들었다. 손잡이가 땀으로 미끄러웠다. 이번에는 정면 돌격이 아니라 원작 게임에서 봤던 다른 방식을 시도해보려 했다. 회피와 견제를 섞은 움직임. 옆으로 반 보 물러서고, 검을 낮게 세우고, 상대의 반응을 보며 파고드는 방식. 게임 화면 속에서는 캐릭터가 그렇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발이 엉켰다. 검이 늦게 나갔다. 머릿속에서는 완벽한 궤적이 그려져 있었는데, 팔은 그 궤적의 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서예린의 손이 다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셋째 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지훈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숨이 너무 가빠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릎이 살짝 꺾였다. 서예린은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잠시 붙잡은 채로 서 있었다. 지훈이 완전히 쓰러지지 않도록. "머릿속으로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서예린이 말했다. 지훈은 순간 온몸이 굳었다. "그런데 몸이 따라주지 않네요. 마치, 자기 몸이 아닌 것처럼." 손끝이 차가워졌다.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예린의 녹색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시선에는 호기심과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마치 벌레를 채집한 사람이 유리병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열다섯 살짜리가 셋째 판까지 다시 하겠다고 말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에요." "...체력을 기르고 싶어서요." "체력만이 아닌 것 같은데요." 서예린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지훈에게 다가와 그의 자세를 바로잡았다. 손이 어깨에 닿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손끝이 지훈의 견갑골 위치를 정확히 짚어냈다. "무게중심을 앞으로. 시선은 상대의 어깨를 봐요. 눈이 아니라." "왜 눈이 아니라 어깨를 봐야 하나요." 지훈이 물었다. 숨은 여전히 가빴지만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눈은 사람을 속이거든요. 어깨는 안 속여요. 몸이 움직이기 전에, 어깨가 먼저 움직여요." 지훈은 그녀의 말을 따랐다. 어깨를 보려고 시선을 낮췄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상대의 움직임이 한 박자 먼저 읽히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검을 내리치는 동작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서예린이 살짝 미소 지었다. "배우는 속도가 빠르네요." "그런가요."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그 말에 지훈은 다시 긴장했다. 서예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다음 동작을 지시했다. 발의 위치, 손목의 각도, 검을 쥐는 손가락의 힘 배분. 하나씩 짚어가며 고쳐주었다. 훈련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해가 높이 뜰수록 지훈의 옷은 땀에 흠뻑 젖었다. 목검을 든 손에는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지훈은 훈련 중간, 그녀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우아한 검술을 보았을 것이다. 흐르는 듯한 동작, 절제된 힘,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 그런데 지훈은 그녀의 발끝이 땅을 스치는 방식을 보고 있었다. 무게를 완전히 싣지 않는 발놀림. 언제든 다른 방향으로 튈 수 있는 준비 자세. 발바닥의 삼분의 일만 땅에 붙이고, 나머지는 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가벼웠다. 이것은 게임에는 없는 정보였다. 텍스트로는 절대 전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전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몸에 새기듯 기억했다. 눈으로 보고, 발로 흉내 내고, 넘어지고, 다시 흉내 냈다. 훈련이 끝나고, 서예린은 나무 그늘에 앉아 물을 마셨다. 목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햇빛에 반짝였다. 지훈도 옆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선생님." "네." "마수에 대해 잘 아시나요." 서예린이 물병을 내리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왜 그런 걸 물어봐요." "그냥, 궁금해서요." 서예린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모험가로 일할 때 많이 봤어요. 크고 작은 것들. 늪지에서 나오는 것들, 산속 동굴에 사는 것들, 밤에만 움직이는 것들." "A급 마수도 보셨나요." 그녀의 손이 잠시 멈췄다. 물병을 쥔 손가락의 마디가 살짝 하얘졌다. "딱 한 번이요." 지훈은 침을 삼켰다. "어땠나요." "살아 돌아온 게 다행이었죠." 그 말이 정원에 낮게 깔렸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지훈은 더 묻지 않았다. 서예린도 더 말하지 않았다. 침묵이 잠시 흘렀다. 그 침묵 속에는 지훈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 "왜 그런 게 궁금해요." 서예린이 다시 물었다. 지훈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제가 마주칠지도 몰라서요." 서예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열다섯 살짜리가 그런 걱정을 해요."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아니요." 서예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의 흙을 털어내며 그녀가 말했다. 흙먼지가 오후의 빛 속으로 흩어졌다. "이상하다기보다는, 궁금해지네요." "뭐가요." "당신이라는 아이가." 그녀는 더 이상 그 화제를 잇지 않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이는 평범했다. 하지만 지훈은 그 평범함 속에도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여백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걷는 순간에도 훈련하고 있었다. 지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작 지식은 완벽하지 않았다. 서예린이라는 인물조차, 지훈이 아는 것은 이름과 직함뿐이었다. 실제로 마주한 사람은, 그가 알던 텍스트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존재였다. 게임 속 텍스트 한 줄로는 그녀가 물을 마시는 방식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표정도, "살아 돌아온 게 다행이었죠"라고 말할 때의 목소리도 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지훈에게서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것 같았다. 지훈은 물집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의 통증이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적어도 이 몸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앞으로 며칠, 몇 달이 더 필요할 것이다. 이 몸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게임 속에서 읽었던 지식과, 지금 이 순간의 근육과 감각이 하나로 붙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 날, 저택 대문 앞에 낯익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지훈은 창문을 통해 그 모습을 먼저 발견했다. 아침 햇살 속에서 대문 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 소매를 걷어올린 채, 손에 유리병을 든 소녀였다. 유리병 속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지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소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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