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는 엔딩은 바꾸기로 했다

1화

천장이 낯설었다. 지훈은 눈을 뜬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나무 서까래. 흰 회벽. 창을 넘어 들어오는 빛의 색이 달랐다. 예전 같았으면 형광등 불빛에 익숙해진 눈이 이런 빛을 어색해했을 텐데, 지금은 그 빛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손가락이 가늘었다. 손등에 핏줄도 서지 않았다.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기억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사흘 전부터, 아니 이 몸의 시간으로는 사흘 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서른둘의 강지훈, 사축으로 일하다 사무실 책상 위에서 쓰러져 죽은 그 강지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열다섯 살, 이 세계의 강지훈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은 이상하게도 선명했다. 야근 여섯 시간째였다. 커피는 세 잔째였고, 모니터 불빛이 눈을 찔렀다. 목 뒤가 뻐근했고 머리가 무거웠다. 그러다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고, 왼쪽 가슴에서 무언가가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다음은, 이 낯선 천장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는, 그가 죽기 전날까지도 밤을 새워 플레이했던 게임 '마수의 심연'이었다. 지훈은 몸을 일으켰다. 관절이 뻐근했다. 어린 몸은 낯설고 가벼웠다. 침대에서 내려서는 순간 발바닥에 닿는 나무 바닥의 감촉조차 생생했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정원의 나무들, 돌담, 그 너머로 이어지는 낮은 산등성이. 익숙한 배경이었다. 게임 속에서 수백 번 지나쳤던 배경. 로딩 화면이 뜨는 짧은 순간마다 뒤에 걸려있던 그 풍경화 같은 배경이, 지금은 눈앞에 실제로 펼쳐져 있었다. 문제는 이 몸의 정체였다. 강지훈. 원작 '마수의 심연'에 등장하는 조연 캐릭터. 메인 스토리에는 거의 나오지 않지만, 특정 서브 퀘스트 루트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이름. 마수 '마골'의 둥지에 끌려가, 산 채로 생명력을 뽑히며 서서히 죽어가는 캐릭터. 게임 안에서 그 장면은 짧았다. 오디오 로그 하나. 대사 몇 줄. 플레이어는 둥지 깊은 곳에서 뿌리처럼 마골의 몸에 박혀 신음하는 소년을 지나쳐야 했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구해줄 것인가, 지나칠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구해줘도 소년은 이미 몸의 절반이 마골의 조직에 동화되어 있었고, 대개 며칠 안에 죽었다. 지나치면 그 자리에서 죽어갔다. 하지만 지훈은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캐릭터의 이름이 자신과 같았기 때문에, 그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었다. 우연이겠지, 흔한 이름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넘겼던 기억이 있었다. 이제는 웃을 수 없는 우연이었다. 영구 양분. 마골의 둥지 깊은 곳, 마수의 몸에 뿌리처럼 박혀 평생 생명력을 공급하다 죽는 존재. 원작에서 이 캐릭터의 최후는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스토리상 큰 의미가 있는 죽음도 아니었다. 그저 배경 설정의 일부, 마골이라는 몬스터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지훈은 손을 쥐었다 폈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심장은 이미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몇 년 뒤 자신은 그 오디오 로그 속의 목소리가 될 것이다. 플레이어가 지나치거나, 혹은 잠시 멈춰서서 듣고 지나가는 그 짧은 신음소리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오태석이었다. 이 집의 집사. 마르고 등이 굽은 노인이었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 지훈이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노인은 세숫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있었다. "오늘은 안색이 좀 나으시군요." "그런가요." "요 며칠 밤에 잠을 설치시는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지훈은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잠을 설친 게 아니라, 다른 삶의 기억이 밀려들어와 뒤척였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서예린 선생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잊지 않으셨죠."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예린. 이 몸의 검술 스승. 원작에서 이름만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던 인물이었다. A급 모험가 출신의 가정교사. 지훈이 아는 정보는 거기까지였다. 어느 지역 출신인지, 왜 가정교사 일을 하는지,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원작 지식은 완벽하지 않았다. 지훈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메인 스토리 캐릭터에 대해서는 세세히 알았지만, 조연이나 배경 인물에 대한 정보는 단편적이었다. 자신의 미래가 걸린 문제인데도, 아는 것이 이토록 부족하다는 사실이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회사에서도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큰 그림은 보이는데, 세부는 늘 누락되어 있었다. 그 습관이 죽어서까지 따라온 것 같아 쓴웃음이 났다. "태석 아저씨." "네, 도련님." "오늘 훈련 전에, 정원에서 혼자 몸을 좀 풀고 싶은데." 오태석은 잠시 지훈을 바라보았다.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 대야를 든 손이 살짝 멈췄다. "요즘 도련님이 좀 달라지셨습니다." "그런가요." "예전엔 훈련이라면 질색을 하셨는데요. 서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면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시던 게 불과 열흘 전인데." 지훈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스스로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웃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람이 좀 변할 수도 있죠." "그렇긴 합니다만." 노인은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지훈은 세숫물에 얼굴을 담갔다. 차가운 물이 뺨에 닿는 순간, 정신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정원으로 나온 지훈은 나무 옆에 세워둔 목검을 집어 들었다.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이상했다. 예전 몸,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있던 몸이라면 상상도 못 할 가벼움이었다. 손바닥으로 목검의 표면을 쓸어보았다. 나무의 결이 손끝에 느껴졌다. 오래 쓴 물건 특유의 매끈함이 있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 원작의 강지훈도 이 검을 몇 번은 쥐어본 적이 있을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는 눈을 감고 상태를 확인했다. 웅— 낮은 울림이 시야 앞에 퍼졌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이 세계에는 게임과 똑같은 시스템이 존재했다. 지훈은 그것을 사흘 전, 처음 상태창을 열어보고 확인했다. 그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했다. 마음속으로 상태창을 떠올리자, 눈앞에 정말로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던 순간. 게임 UI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배치. 이름: 강지훈 레벨: 1 특성: 견디기 스킬: 없음 특성 '견디기'. 원작에서 이 특성을 가진 캐릭터는 몇 명 없었다. 데미지를 일정 부분 무효화하고, 극한의 상황에서 스탯이 일시적으로 상승하는 특성.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쪽이었다. 지훈이 기억하는 원작 캐릭터 중 이 특성을 가진 이는 후반부 보스급 몬스터를 상대로도 버텨내는 서브 탱커였다. 문제는 스킬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특성만 좋아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스킬이 있어야, 실제로 싸울 수 있었다. 지훈은 목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게임 속에서 수백 번 조작했던 검술 동작이었다. 손목을 돌리고, 무게중심을 낮추고, 검을 내리쳤다. 허공을 갈랐다. 다시. 다시. 몸이 삐걱거렸다. 열다섯 살의 몸은 근육이 붙지 않은 상태였다. 스무 번쯤 휘두르자 팔이 무거워졌다. 오십 번쯤 되자 숨이 가빠졌다. 게임 속에서는 캐릭터가 지치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면 그대로 움직였다. 스태미나 바가 있었지만 그것도 결국 숫자였을 뿐, 실제로 몸이 뻣뻣해지거나 근육이 아려오는 감각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짜 몸이었다. 근육이 타는 듯한 감각. 폐가 조여드는 느낌. 다리가 후들거렸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고, 목검을 쥔 손바닥에도 땀이 배었다. 지훈은 검을 놓칠 뻔했다. 무릎이 살짝 꺾였다. 숨을 몰아쉬며 그는 바닥에 한쪽 손을 짚었다. 땀이 이마에서 떨어져 흙바닥에 얼룩을 만들었다. 시야가 잠깐 흐려졌다가 다시 초점이 맞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약해서야."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원작 지식이 아무리 완벽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없었다. 지훈은 그 사실을 몸으로 절감하고 있었다. 서른두 살의 기억 속에서는 검술 동작이 완벽하게 재생됐다. 각도, 타이밍, 힘의 분배까지. 하지만 몸은 그 기억을 따라올 근력도, 유연성도 없었다. 머리와 몸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마골의 둥지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원작 타임라인대로라면 몇 년은 남아 있었다. 그 시간 안에 이 몸을 단련해야 했다. 게임 지식이라는 무기를 쓸 수 있을 만큼의 그릇을 만들어야 했다. 몇 년이라는 시간이 길게도 짧게도 느껴졌다. 죽음까지의 카운트다운이 이미 시작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 검을 잡았다. 손바닥에 배긴 땀 때문에 손잡이가 미끈거렸다. 옷소매로 손을 한 번 닦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원 저편, 담장 너머의 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발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상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걸음마다 절제된 힘이 느껴졌다. 지훈은 그 발소리만으로도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게임 속에서 수백 시간을 보낸 그였다. 발소리 하나로 캐릭터의 숙련도를 가늠하는 버릇이 어느새 몸에 붙어 있었다.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한 여자가 정원 입구에 서 있었다. 은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눈동자는 연한 녹색이었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에는 이십 대의 것이 아닌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수많은 전투를 치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 지훈이 아는 어떤 회사 상사도, 어떤 게임 속 NPC도 이런 눈빛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훈은 숨을 멈췄다. 서예린이었다. 원작에서 짧게 스쳐 지나가던 이름의 주인이 지금, 지훈의 정원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에 찬 검이 걸음에 맞춰 가볍게 흔들렸다. 실전용으로 보이는, 손잡이가 오래 사용된 흔적이 있는 검이었다. 교습용 목검을 든 지훈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지훈의 흐트러진 자세, 땀에 젖은 옷, 떨리는 손끝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순서대로, 마치 무언가를 검사하듯이. "혼자 연습하고 있었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소리를 들은 순간 게임 속 오디오 로그의 몇 마디가 겹쳐 떠올랐지만, 지금 눈앞의 목소리는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왔다. 걸음마다 흙이 살짝 눌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목검을 든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세가 틀렸어요." 지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이 꺾여 있었다. 서른두 살의 기억은 완벽한 동작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몸은 전혀 다른 자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디가 틀렸습니까." 그가 겨우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서예린은 대답하지 않고, 대신 그의 손목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차가운 감촉이었다. "전부." 그 말 한마디에, 지훈은 자신이 넘어야 할 벽이 얼마나 높은지 실감했다. 몇 년 안에 이 벽을 넘지 못하면, 그 오디오 로그 속 목소리가 정말로 자신의 것이 될 터였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