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옥상으로 가는 계단이 유난히 길게 느껠졌다.
한 칸, 한 칸. 발을 옮길 때마다 심장이 먼저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어제 그 애가 건넨 말 한마디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는 걸, 나 자신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문을 열자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눈이 다시 내릴 것 같았다. 옥상 바닥에는 지난주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회색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발밑에서 얼음 밟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교복 위에 걸친 검은 코트가 바람에 조금씩 부풀었다. 목도리 끝이 흔들리고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백설윤이었다.
"왔네." 그녀가 몸을 돌리며 나를 보고 말했다.
표정이 어제와 달랐다. 뭔가 결심한 얼굴이었다. 입술을 다문 각도, 눈썹이 살짝 모인 모양. 나는 그 얼굴을 5년 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무대 뒤에서, 카메라가 꺼진 순간에.
"할 말이 뭐야." 나는 물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담담하게 나와서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어제 네가 한 말, 계속 생각났어." 그녀가 나를 똑바로 봤다.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왜 그 말에 신경 쓰이는지 나도 모르겠어서, 그게 짜증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을 고르는 동안 바람이 한 번 더 불었고, 그녀의 앞머리가 흩날렸다.
"보통은 이런 거 신경 안 써." 그녀가 팔짱을 꼈다.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사람들이 나 좋아하는 게 당연하니까. 근데 너는... 아니잖아."
"내가 너 안 좋아한다고 한 적 없어."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을 뱉으면서도 발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그냥, 이유 없이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한 거야."
그녀가 잠시 나를 쳐다봤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럼 이유가 있으면 좋아할 수도 있다는 거야?"
그 질문에 심장이 덜컹했다.
숨을 한 번 삼켰다. 목 안쪽이 따가웠다.
5년 후의 기억이 다시 밀려왔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지어준 웃음. 함께 걷던 벚꽃길, 꽃잎이 그녀의 어깨 위로 떨어지던 순간. 손을 처음 잡았던 순간, 그때 그녀의 손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그 모든 게 진짜였는지, 나는 이제 확신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게 어디서부터 계산이었는지, 어디서부터 진심이었는지 구분이 안 됐다.
"모르겠어." 나는 진심으로 답했다.
그녀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아주 짧게.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런 대답 처음 들어봐." 그녀가 픽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보통 남자애들은 무조건 좋아한다고 하는데."
"난 그런 애가 아니라서."
"알아." 그녀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서 신경 쓰이는 거고."
바람이 다시 불었다. 그녀의 목도리가 흔들렸다. 그 틈으로 목덜미가 살짝 드러났다가 금세 가려졌다.
침묵이 몇 초 흘렀다. 나는 그 침묵이 낯설지 않았다. 5년 후에도, 그녀와 나 사이에는 이런 종류의 침묵이 자주 있었다.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던 시간들이었다.
"나 방송국 연습생 제안받았어." 그녀가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목소리에 억지로 힘을 넣은 것 같았다. "오디션 붙은 다음에 연락 왔어."
나는 순간 표정을 굳혔다.
원래의 기억과 달랐다. 원래는 이 시기에 연습생 제안이 오지 않았다. 오디션에서 떨어졌으니까. 그때 그녀는 이 옥상 대신 다른 곳에서, 아마 자기 방에서 혼자 울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야, 몇 년이 지나서야 들었다.
앰프를 고친 대가였다.
내가 손댄 그 작은 변화가, 그녀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밀고 있었다. 손끝 하나로 톱니바퀴 하나를 옮겨놓은 것뿐인데, 그 여파가 이렇게 크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할 거야?" 나는 물었다. 목소리를 최대한 평범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모르겠어." 그녀가 난간을 손으로 쓸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엄마는 반대하셔.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고."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해보고 싶어." 그녀가 처음으로 망설임 없이 말했다. "진짜, 진심으로."
그 말에 담긴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5년 후, 무대 위에서 그녀가 짓던 그 표정과 닮아 있었다. 조명 아래에서, 수만 명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던 그 눈빛. 다만 지금은 그 안에 순수한 열망만 있었다. 계산이나 냉소는 없었다. 그게 오히려 낯설었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이 애를 도와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멈춰야 하나.
머릿속으로 여러 갈래의 길이 펼쳐졌다. 그녀가 연예계에 발을 들이면, 원래의 미래처럼 그녀는 성공할 것이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웃고,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그리고 언젠가 나를 그 지긋지긋한 방식으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 지긋지긋한 5년을 반복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이었다. 내가 막을 권리는 없었다.
내 두려움 때문에 이 애의 꿈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들이 하는 짓이었다.
"해봐." 나는 결국 말했다. "하고 싶으면 해야지."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그 시선이 얼굴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왜 응원해줘? 너 나한테 관심도 없다면서."
"관심 없는 거랑, 응원하는 거랑 다른 문제야."
그녀가 작게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어깨가 살짝 들리고,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그런 웃음.
"너 진짜 이상한 애 맞네."
그 말 끝에 그녀가 난간에서 몸을 떼고 나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
그날 이후, 나는 그녀와 조금씩 거리를 두면서도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했다.
연습생 생활이 시작된 그녀는 주말마다 서울로 오가며 바빠졌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시간도 줄었다. 복도에서 스치듯 지나갈 때, 그녀는 늘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예전보다 더 또렷하게, 더 단단하게.
나는 그 시간에 다른 것에 집중했다.
미래에서 알게 된 정보들 — 어떤 전공이 유망한지, 어떤 자격증이 필요한지, 심지어 몇 년 후 유행할 기술까지. 그걸 조용히 준비해나갔다. 밤마다 책상 앞에 앉아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5년 후의 뉴스, 5년 후의 시세, 5년 후의 유행. 그 기억들을 잊기 전에 붙잡아두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반 친구 하나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너 요즘 뭐 하고 다녀?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아."
나는 대답 대신 웃었다.
"그냥, 좀 정신 차린 거지."
그 말이 얼마나 부족한 설명인지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몇 달이 흘렀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창밖으로 벚나무 가지에 꽃봉오리가 맺히는 걸 보면서, 나는 자꾸만 5년 후의 벚꽃길을 떠올렸다. 그 길을 다시 걷게 될까. 아니면 이번엔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될까.
설윤은 정식 연습생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교에는 소문이 퍼졌다. 누가 어디서 봤다더라, 회사가 어디라더라, 이런저런 말들이 복도를 떠돌았다. 다들 그녀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예전엔 그저 예쁜 애, 인기 많은 애였던 그녀가 이제는 '연예인이 될 애'로 불리기 시작했다.
나는 멀리서 그 변화를 지켜봤다. 가까워지지 않으려 애썼다. 그게 맞는 선택이라 믿었다.
교실 창가에 서서 운동장을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손끝을 주먹 안으로 말아 넣었다.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다가가면 안 된다는 마음이 매번 부딪혔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 낡은 폴더폰이 다시 울렸다.
방 안은 어두웠다. 스탠드 불빛 하나만 켜져 있었고, 책상 위엔 펼쳐둔 노트가 그대로였다. 진동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발신자, 백설윤.
손이 먼저 움직였다. 폴더를 열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이 초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자 한 줄이 화면에 떠 있었다.
"나 데뷔 확정됐어. 그리고...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아무한테도 말 못 한 거야."
나는 그 문자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글자 하나하나를 다시 읽었다. 데뷔 확정. 할 얘기. 아무한테도 말 못 한 거.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무슨 얘기일까.
데뷔가 확정됐다는 건 축하할 일이었다. 그런데 왜 마지막 문장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 아무한테도 말 못 한 거라니.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창밖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의 온도는 그대로였는데, 이상하게 등줄기가 서늘했다.
나는 답장을 쓰려고 몇 번이나 자판을 눌렀다가 지웠다. 뭐라고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 얘기가 우리 두 사람을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끌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폴더폰 액정의 불빛이 방 안을 희미하게 비췄다. 그 빛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