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복도에 정적이 흘렀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바닥 타일에 비스듬히 떨어졌다. 그 빛 속에 서 있는 백설윤의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손이 내 팔을 붙잡은 채 놓지 않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아니, 차가운 건 내 팔이었을지도 모른다.
"말해봐." 그녀가 다시 물었다. "너 나 알아?"
눈빛이 곧았다. 흔들림 없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 눈.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미래에서 왔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간 정신병자로 몰릴 게 뻔했다. 아니, 정신병자로 몰리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었다. 이 학교, 이 시간, 이 순간 자체가 통째로 무너질지도 몰랐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5년 후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 아직 앳된 눈매. 그런데도 눈빛만은 그때와 똑같았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조금은 오만한 눈빛.
"몰라." 나는 팔을 슬쩍 뺐다. 그녀의 손이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그냥 눈치가 좀 빠른 편이라서."
"눈치?" 그녀가 피식 웃었다. 웃음에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눈치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나 원래 계단으로 안 가고 엘리베이터로 가는데, 오늘은 계단으로 갈 거라는 것까지 맞췄잖아."
"그냥 찍었어."
"찍었다고?" 그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믿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한참 훑어봤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마치 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스캔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버텼다. 더 캐묻지는 않았다.
"됐어." 그녀가 손을 놓았다. "이상한 애."
그러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소리를 세고 있었다. 열두 걸음. 그녀는 늘 열두 걸음 만에 복도 끝 모퉁이를 돌았다. 그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소름 끼쳤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벽에 손을 짚고서야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
그날 밤, 나는 방 안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낡은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희미한 빛을 뿌렸다. 그 불빛 아래, 5년 후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 번 밀려오기 시작하니 막을 수가 없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그 시절, 나는 그녀의 매니저에게 커피를 타주고 있었다. 좁은 대기실, 종이컵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 손목에 화상 자국이 남을 만큼 뜨거웠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녀는 촬영장 대기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오빠, 아까 그 브랜드 미팅 자료 정리했어?" 그녀가 물었다.
"응, 다 해놨어."
"잘했네." 그녀는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거 말고는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그거라도 잘해야지."
그 말이 웃음 속에 섞여 있었다. 웃으면서 하는 말이라 더 아팠다. 나는 그때도 그냥 웃었다. 화가 나는 게 아니라, 화를 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벌어오는 돈으로 밥을 먹고, 그녀의 이름으로 얻은 특혜 속에서 지내던 나였으니까.
또 다른 기억이 이어졌다.
그녀가 시상식에서 상을 받던 날. 화려한 조명, 반짝이는 드레스, 플래시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졌다. 나는 객석 맨 뒤에 앉아 있었다. 초대받은 게 아니라, 억지로 티켓을 구해 앉은 자리였다. 카메라는 그녀만 비췄다. 소감을 말하는 그녀 입에서 내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항상 응원해주시는 팬분들"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 눈물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이제는 헷갈렸다.
집에 돌아가는 차 안,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흐르듯 지나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소감 말할 때, 나 얘기는..."
"그런 얘기를 왜 방송에서 해." 그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창밖을 보던 시선조차 나에게 주지 않았다. "오빠, 좀 눈치 있게 살아."
눈치 있게 살아. 그 말을 그녀는 참 좋아했다. 내가 뭘 요구할 때마다, 뭔가를 기대할 때마다 튀어나오던 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이불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결혼 얘기도 그녀 입에서 먼저 나온 적이 없었다. 매번 내가 조심스럽게 꺼내면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어느 날은 급하게 스케줄을 만들어냈고, 어느 날은 배가 아프다며 대화를 끊었다. 나는 그게 부끄러움인 줄 알았다. 결혼이라는 단어 앞에서 설레서 그런 거라고, 그렇게 멋대로 해석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녀의 눈빛에 스쳤던 건 설렘이 아니라 귀찮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편한 존재였다.
돈을 대주고,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고, 불평 없이 곁을 지켜주는 존재. 짜증을 부려도 받아주고, 무시해도 화내지 않는 존재.
그게 5년의 실체였다.
천장의 형광등이 다시 한 번 깜빡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는, 다시는 그 시간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
다음날 학교, 급식실로 향하던 길에 그녀와 다시 마주쳤다.
"어제 그거, 아직도 신경 쓰여." 그녀가 대뜩 다가와 말했다.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치켜든 자세였다. "너 진짜 이상한 애야."
"그런가."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뭐야, 그 반응."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표정에 불쾌함이 살짝 스쳤다. "보통 애들은 나 이렇게 말 걸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데."
주변을 지나던 아이들 몇 명이 걸음을 늦추고 우리를 힐끗거렸다. 백설윤이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왜 좋아해야 되는데?"
그 말이 나온 순간, 그녀의 표정이 확 굳었다.
"...뭐?"
"너 예쁜 거 알아."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노래 잘하는 것도 알고. 근데 그게 내가 너한테 잘 보여야 하는 이유는 아니잖아."
나는 스스로도 놀랐다. 이런 말을 이렇게 담담하게 할 수 있다는 게. 5년 전이라면, 아니 5년 후의 나였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녀의 기분 하나에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이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얼굴에 붉은 기가 살짝 올라왔다. 화가 난 건지, 다른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폈다.
"...두고 봐." 그녀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떨렸다. "너 같은 애 처음 봐서 신기한 거지, 그 이상 아니야."
"그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가 홱 돌아서 걸어갔다.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급식실로 향하던 아이들이 다시 수다를 떨기 시작했지만, 그중 몇몇의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걸로 됐다. 거리를 둬야 했다.
5년 후, 저 애가 나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기 때문에. 다시는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커피를 타주고, 눈치를 보고, 뒤에서 조용히 웃으며 견디는 그런 사람으로는.
***
그렇게 다짐한 그날 밤, 나는 알림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낡은 폴더폰 문자 알림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액정 불빛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발신자, 백설윤.
손끝이 순간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렇게 빨리 다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거리를 둔다는 다짐이 하룻밤도 못 가서 시험대에 오른 셈이었다.
문자 내용은 단 한 줄이었다.
"내일 옥상으로 와. 할 말 있어."
나는 그 문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짧은 문장 하나에 담긴 무게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이 애가, 아니, 이 여자가 5년 후 나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저 짧은 한 줄에 이렇게 심장이 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폴더폰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미 답장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