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펜트하우스 거실은 조명 하나 없이도 환했다.
창밖 야경이 그대로 벽을 대신했다. 통유리 너머로 강이 반짝였다. 그 화려한 불빛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추웠다.
발밑에 깔린 대리석 바닥은 겨울보다 차가웠다. 발가락 끝이 시렸다.
"오빠, 또 그 얘기야?"
설윤이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나를 내려다봤다. 손톱은 오늘 새로 한 딥레드였다. 그 색이 유난히 눈에 박혔다. 며칠 전에는 누드톤이었다. 색이 바뀔 때마다 그녀의 손은 점점 더 낯설어졌다.
"이번 달 카드값 얘기야." 내가 말했다. "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뭘 해." 설윤이 웃었다. 웃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오빠가 뭘 할 수 있는데."
그 말이 가슴 어딘가를 후벼 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을 삼키는 데는 이제 익숙했다. 삼킨 말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다. 그냥 목 안 어딘가에 계속 쌓이는 것 같았다.
식탁 위엔 그녀의 매니저가 두고 간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광고 세 개, 드라마 하나. 숫자에는 동그라미가 여덕 개나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숫자를 셀 때마다 내가 점점 작아지는 걸 느꼈다.
셀 때마다 숨이 조금씩 짧아졌다.
"용돈 필요하면 말해." 설윤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테이블에 던졌다.
탁.
그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필요 없어." 나는 카드를 밀어냈다.
"필요 없으면 어쩔 건데. 오빠 통장에 얼마 남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 말이 맞았다. 통장에는 이제 세 자릿수 잔액만 남아 있었다. 그마저도 얼마 전 그녀가 준 생활비였다.
5년 전, 그녀와 함께 자취방을 나와 이 집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나는 뭐든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설윤이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걸어갔다. 물병을 꺼내 마시며 나를 힐끗 봤다.
"오빠." 그녀가 물병을 든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 요즘 스케줄 얼마나 빡빡한 줄 알아? 오빤 그냥 집에서 밥이나 챙기고 나 기다리면 되는 거잖아. 그게 그렇게 힘들어?"
"그게 다가 아니잖아."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도 뭔가 하고 싶어."
"그럼 해." 설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말렸어?"
말릴 필요도 없었다.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이 나를 다른 걸 할 수 없게 만들어 놨으니까.
"헤어지자." 나는 말했다.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손이 떨렸다.
설윤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눈빛에는 놀람도, 슬픔도 없었다. 그냥 지루함이었다.
"진심이야?" 그녀가 물었다.
"진심이야."
설윤이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뭔가 격렬한 반응을 기대했던 걸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붙잡아주길 바랐던 걸까.
"그래." 그녀가 다리를 풀며 일어섰다. "그럼 나가. 이 집 내 이름으로 돼 있는 거 알지?"
그 말투는 마치 오늘 저녁 메뉴를 정하듯 가벼웠다.
5년이 그렇게 쉽게 정리될 수 있다는 게,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짐을 챙길 시간도 주지 않았다. 나는 옷 몇 벌만 손에 쥐고 문을 나섰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끈을 두 번이나 다시 묶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스물세 살. 아니, 스물네 살이었나.
어느 순간부터 내 나이도 헷갈렸다.
거울 속 얼굴은 낯설었다. 초점 없는 눈, 핏기 없는 입술. 이게 정말 나인가 싶었다.
밖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코트 하나 걸치지 못한 채 나는 강변을 따라 걸었다.
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팔을 감싸 안았지만 소용없었다.
걸으면서 5년이 스쳐 지나갔다.
대학 등록금을 그녀가 내줬을 때, 나는 고마웠다. 그때 설윤은 아직 무명이었다. 작은 소극장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통장에 몇만 원밖에 없던 그녀였다.
"오빠 덕분에 나 여기까지 왔어." 그녀가 그렇게 말하던 밤도 있었다. 첫 드라마 조연을 따낸 날, 우리는 편의점 앞에 앉아 컵라면을 나눠 먹었다. 그날 그녀의 웃음은 진짜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녀가 유명해지고 나서도 나는 곁을 지켰다. 그녀의 스케줄에 맞춰 내 삶을 다 접었다. 취업 준비도, 친구도, 다 놓았다. 대학도 자퇴했다. 그녀 매니저 일까지 도맡아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나를 짐처럼 대했다.
방송에서 웃던 그 얼굴과, 집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얼굴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히 그 순간을 짚어낼 수가 없었다. 아마 서서히,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그녀의 눈빛이 변해갔을 것이다. 나는 그저 못 본 척 지나쳤을 뿐이었다.
다리 밑 벤치에 앉았다. 눈이 어깨 위로 쌓였다.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닦을 힘도 없었다.
눈송이가 뺨에 닿아 녹는 느낌마저 아득했다.
강물 소리가 들렸다. 얼어붙지 않은 부분이 검게 흐르고 있었다. 그 검은 물결을 한참 바라봤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다른 선택을 했을까.
그 겨울, 고등학교 2학년 겨울, 설윤을 처음 만났던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날, 교실 뒷문에서 그녀가 나를 불렀던 순간으로.
"저기, 너 이름이 뭐야?" 그렇게 물었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 눈물이 더 쏟아졌다.
왜 그 순간이 지금까지 이렇게 선명한 걸까.
왜 나는 여전히 그 겨울을 그리워하는 걸까.
바보 같았다. 5년을 버려놓고도 아직 그 시작을 붙잡고 있는 내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터졌다.
귀가 먹먹해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빛이었다. 눈이 아니라, 어디선가 쏟아지는 새하얀 섬광.
주변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강물 소리도, 바람 소리도, 내 숨소리마저.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막혔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시간이 통째로 얼어붙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돌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모든 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