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회귀했다, 이번엔 안 반한다

2화

눈을 떴다. 천장 벽지에 노란 얼룩이 있었다. 물이 샜던 자국 같았다. 처음 보는 무늬였다. 낡은 형광등이 깜박거렸다. 치직. 전구가 다 되었는지 불빛이 자꾸 흔들렸다. 창밖에서 참새가 울었다. 짹, 짹. 유리창 너머로 겨울 햇살이 얇게 스며들었다. 이상했다. 분명 어제까지, 아니 방금 전까지 나는 서른셋의 몸으로 그 강변을 걷고 있었다. 차가운 강바람. 손끝이 얼어붙던 감각. 그리고 그 새하얀 빛. 그런데 지금 이 방은 낯설었다. 책상 위 낡은 데스크톱, 벽에 붙은 아이돌 브로마이드, 옷장 문에 붙은 시간표 종이까지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매끈했다. 수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수염이 없었다. 턱선도 낯설게 작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귓속에서 심장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릎을 짚고 겨우 책상 앞으로 걸어가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는 열여덕 살짜리 얼굴이 있었다. "이게 뭐야." 목소리가 낯설었다. 갈라지지 않은,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니, 내 목소리였다. 옛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숨이 막혔다. 책상 위 달력을 다급히 뒤졌다. 넘기는 손이 떨려서 몇 장이 그대로 찢어졌다. 12월. 숫자 아래 작게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2학년 2학기 기말고사. 그 밑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뭔가 적혀 있었다. 내 필체였다. 지금보다 더 어리고 서툰 필체. "기말 끝나면 노래방"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서른 즈음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설윤의 얼굴, 그 차가운 눈빛, 마지막으로 걷던 강변, 그리고 그 새하얀 빛까지. 전부 생생했다. 어제 일처럼, 방금 일처럼. 그런데 몸은 열여덕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차가운 방바닥이 엉덩이에 닿았다. 창밖으로 겨울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방 안은 낡았지만 따뜻했다. 벽지는 낡고 책상은 흠집투성이였지만, 이상하게 이 좁은 방이 따뜻했다. 5년 후의 그 통유리 펜트하우스, 넓고 반짝이지만 텅 빈 그 공간보다 백 배는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노크 소리가 났다. 똑똑. "준서야, 학교 안 가?" 어머니 목소리였다. 숨이 턱 막혔다. 5년 후엔 한 번도 듣지 못한, 걱정 어린 목소리였다. 5년 후의 나는 그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었다. 병실 침대 위, 산소호흡기를 낀 채 눈도 뜨지 못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목이 메어 말이 안 나왔다. "준서야?" 문 밖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걱정스러운 기색이 묻어 있었다. "가요." 나는 겨우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멀어졌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된장국 냄새가 문틈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바닥에 앉아 있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웃긴 일이었다. 서른셋 남자가 죽어서 열여덕 소년의 몸으로 돌아왔는데, 우는 이유는 결국 엄마 목소리 하나였다. 교복을 입는 손이 서툴렀다. 몸이 기억하는 동작과 마음이 아는 동작이 자꾸 어긋났다. 셔츠 단추를 두 번이나 잘못 끼웠고, 넥타이는 세 번이나 다시 맸다. 손끝이 자꾸 미끄러졌다. 거울 속 낯선 얼굴을 다시 봤다. 이 얼굴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 생각이 들자 손끝이 저렸다. 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섰다. 골목은 좁고 낡았다. 담벼락에 붙은 전단지가 바람에 팔락거렸다. 편의점 앞에 서 있던 고양이가 나를 보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학교로 가는 길, 골목 어귀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버스 정류장에 그 애가 서 있었다. 교복 위에 낡은 회색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턱까지 두른 여자애였다. 하얀 입김이 목도리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정류장 표지판에 등을 살짝 기댄 채, 이어폰 한쪽을 낀 모습이었다. 순간 숨이 멎었다. 그 얼굴이었다. 5년 후,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던 그 얼굴이 아니라, 아무 꾸밈 없는, 앳된 그 얼굴. 화장기 없는 뽀얀 얼굴에 코끝만 빨갰다. 발이 저절로 그쪽으로 움직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가 이어폰을 빼며 슬쩍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뭘 그렇게 봐." 그녀가 나를 향해 톡 쏘듯 말했다. 낯을 가리는 듯 시선을 피했지만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백설윤..." 나는 그 이름을 겨우 입에 담았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내 이름 아는 거 이상하네. 우리 반 아니잖아." 그녀가 팔짱을 끼며 나를 훑었다. 위아래로 슥, 훑어보는 시선이 낯설지 않았다. 5년 후에도 저런 눈으로 나를 본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무대 뒤 대기실에서였다. 맞다. 이때는 아직 같은 반이 아니었다. 겨울방학이 지나야 3학년 준비반에서 만나게 될 사이였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녀를 몰라야 했다. 이름조차 낯설어야 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소문 들었어." 나는 얼른 둘러댔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를 썼다. "백설윤, 노래 잘한다고." 그 말에 그녀 표정이 살짝 풀렸다. 콧대 높은 얼굴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뭐 그런 소문이 다 있대." 그녀가 새하얀 입김을 뿜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다시 나를 슬쩍 돌아봤다. "근데 신기하게 듣기 좋네."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그 표정을 나는 알고 있었다. 5년 후, 조명 아래에서도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다. 딱 한 번, 무대 뒤에서. 그때는 저 웃음이 진심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저 웃음은 그냥 열여덕 살 여자애의 웃음이었다. 아무런 계산도 없는. 버스가 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정류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올라탔다. 버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쓔욱. 나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버스가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5년 후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가 겹쳐 보였다. 같은 사람인데,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5년 후의 그녀는 눈빛에 날이 서 있었다. 나를 볼 때마다 그 눈빛엔 지겨움과 냉소가 섞여 있었다. 지금 이 애의 눈빛엔 그런 게 없었다. 그저 낯선 사람을 향한 경계심 정도였다. 이 애가 그 사람이 되기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 나는 알고 있었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왜냐면 내가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으니까. 교실로 들어서며 나는 생각했다. 이번엔 다르게 살아야 한다. 책상에 앉아 창밖을 봤다. 운동장에 눈이 살짝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낯설고도 익숙한 소음이었다. 그런데 그 다짐이 채 굳기도 전에, 담임이 종례 시간에 던진 한마디가 내 발을 붙잡았다. 교탁 앞에 선 담임이 서류철을 펼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에서 지역 방송국 오디션이 열린다는구나. 관심 있는 학생은 신청해라." 교실 안이 잠깐 소란스러워졌다. 몇몇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오디션이 뭔데요?" "연습생 뽑는 거 아니야?" 담임이 손을 들어 조용히 시켰다. "신청서는 교무실에 있으니까, 관심 있으면 금요일 전까지 제출하고." 금요일. 나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손끝부터 시작된 오한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책상 밑으로 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날, 백설윤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날이었다. 원래의 기억 속에서, 그 오디션은 그녀를 연예계로 이끈 첫 발걸음이었고 — 동시에, 우리 관계가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교실 창밖으로 겨울 하늘이 보였다. 낮게 깔린 잿빛 구름 사이로 해가 희미하게 비쳤다. 금요일까지, 이제 나흘. 머릿속에 5년 후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녀가 오디션 무대에 올라가던 순간. 심사위원들의 놀란 얼굴. 그리고 그날 이후로 달라지기 시작한 그녀의 표정.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오디션이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줬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그 오디션이 그녀에게서 얼마나 많은 것을 빼앗아갔는지도 알고 있었다. 이대로 두어야 할까. 아니면, 막아야 할까. 담임의 목소리가 멀리서 계속 이어졌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질문만 맴돌았다. 이번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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