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고백 패배자 동맹

3화

카페 아네모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건 어제와 거의 같은 시간이었는데, 나는 그 종소리만으로도 누가 들어왔는지 짐작할 수 있어서 손끝이 먼저 반응했다. 걸레를 쥔 손이 테이블 위에서 멈추고,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만들어야 했다. 고개를 들자 서지안이 어제와는 조금 다른 얼굴로, 그러니까 어제보다는 조금 정돈된 머리와 조금 덜 붉어진 눈으로 서 있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표정이라는 걸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표정은 마치 어제의 눈물을 서둘러 지운 자국 위에 얇은 화장을 덧바른 것 같아서, 오히려 더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도 오시네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그저 눈으로만 자리를 가리켰고, 그녀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어제와 같은 창가 자리에 앉으며 가방을 무릎 위에 얹었다. 창밖으로는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빛이 지안의 뺨을 스치며 어제의 눈물 자국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아서 나는 괜히 안도했다. "오늘은 안 울려고 왔어." 지안이 먼저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렸다. 나는 물을 가져다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 침묵을 서운해하는 기색도 없이 창밖을 응시하다가 다시 나를 올려다봤다. "너는 어때. 괜찮아졌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순간 대답을 고르지 못했는데, 어제 내가 그녀에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나한테 그런 걸 묻는 걸까. 물잔을 내려놓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나는 그걸 감추려 손을 얼른 뒤로 뺐다. "괜찮다기보단… 그냥 그런 거죠." 나는 말끝을 흐리며 자리를 뜨려 했지만, 지안이 손을 뻗어 테이블을 살짝 두드리는 걸로 나를 붙잡았다. "앉아봐. 어제는 내가 실컷 울었으니까, 오늘은 네 얘기 좀 들어보자." 그 말에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다. 도대체 왜,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동시에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궁금해한다는 사실이 낯설고 서투르게 반가워서 나는 결국 맞은편에 앉고 말았다. 의자를 당겨 앉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되물었다. 이 사람이 정말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묻는 걸까, 아니면 그냥 어제의 자기 자신을 잊기 위한 화제 전환일 뿐일까. 그러나 입을 열려던 순간, 카페 문의 종이 다시 딸랑 울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아!" 하준이 특유의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며 들어왔고, 그 뒤로 소이가 따라 들어오며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는 순간 온몸의 근육이 굳는 걸 느꼈는데, 그건 반가움이 아니라 방금 전까지 지안 앞에서 조금이라도 열리려던 마음이 순식간에 다시 문을 닫아버리는 감각이었다. 의자에서 채 일어서기도 전에 나는 이미 표정을 고쳐 쓰고 있었고, 그 빠른 전환이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익숙했다. "여기서 알바하는 거 진짜 신기하다." 하준이 카운터로 다가오며 웃었고, 소이는 지안을 슬쩍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지안이? 학생회 부회장 맞지?" 지안은 순간 표정을 정리하며 평소의 완벽한 웃음을 되찾았는데, 나는 그 짧은 순간의 전환이 얼마나 익숙한 방어인지 알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방금 전까지 창밖을 보며 어깨를 떨던 사람이 저렇게 빠르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나도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우리 같은 반은 아니지만 알지, 서지안. 학생회에서 유명하잖아." 소이가 반갑게 말을 건넸고, 지안은 적당히 예의 바른 대답을 하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 사이에서 어색하게 서 있다가, 소이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다시 심장이 조여왔다. "도윤아, 우리 이번 주말에 셋이 놀자. 하준이도 좋다고 했어." 소이는 아무 의심 없이, 정말로 아무 계산 없이 말했는데, 그 순진한 제안이 오히려 칼처럼 느껴졌다. 예전처럼. 그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예전처럼이라니, 소이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싶어서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도 모르는 얼굴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리가.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 좋지." 겨우 그 한마디를 뱉어내는데도 목이 탔다. 입안이 마른 모래를 삼킨 것처럼 껄끄러웠고, 나는 물컵을 들어 괜히 한 모금 마시며 시간을 벌었다. 하준은 그런 나를 보며 별생각 없이 웃었지만, 소이가 카운터를 떠나 화장실로 향한 짧은 사이, 하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나에게 머무는 걸 느꼈다. 뭔가를 살피는 듯한, 그러나 아직 확신에는 이르지 못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며 애꿏은 트레이를 정리하는 척했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하준이 봤을까 봐 뒤늦게 걱정이 됐다. 저러다 눈치채면 어떡하지.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를 고르는 동안, 나는 다시 지안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지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물잔을 만지작거리던 손끝이 미묘하게 멈춰 있었고,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어제와는 다른 종류의 무언가가 실려 있었다. 그 눈빛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서늘한 확신 같은 것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방금 그 표정." 지안이 낮게 말했다. "내가 아까 지은 표정이랑 똑같았어." 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고, 지안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들켰구나. "됐어, 말 안 해도 돼. 근데…" 그녀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손가락으로 물잔의 물기를 천천히 훑으며, 마치 다음 말을 고르는 듯한 시간을 두었다. "그 여자애, 조심해야 할지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거니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되묻기도 전에, 소이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다시 밝게 웃으며 우리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지안의 말이 가슴 한구석에 박혀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소이의 웃음이 저렇게 환한데, 저 웃음 뒤에 정말 아무것도 숨겨져 있지 않은 걸까, 아니면 지안이 말한 그 '모른다'는 것 자체가 언젠가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 무기가 되는 걸까. 카운터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고, 나는 등 뒤로 느껴지는 두 개의 시선—지안의 것과 하준의 것—사이에서 도무지 어느 쪽도 편하게 마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종소리는 이미 멀어졌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가게 안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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