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고백 패배자 동맹

1화

한빛고 축구부 훈련장 옆 벤치에 앉아 물병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운동장 저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숨이 턱 막혀버렸다. 소이가, 초등학교 3학년부터 알고 지낸 그 애가, 하준의 어깨를 툭 치며 까르르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여느 때와는 결이 달랐다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평소의 소이는 웃을 때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큰 소리를 냈는데, 지금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어깨만 들썩이며 웃고 있었고, 그 조심스러운 웃음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손끝이 먼저 저릿하게 식어갔고, 심장이 이상한 속도로 쿵, 하고 내려앉는 감각이 들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하준이 소이의 머리카락을 슬쩍 넘겨주었고, 소이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은 채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 짧은 순간의 정지된 장면이, 마치 사진처럼 눈앞에 박혀버렸다. 아,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 두 사람 사이에 이미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는 걸. 5년이었다. 내가 소이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해온 시간이었다. 소이와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 봄, 비가 내리던 전학 첫날이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있던 소이에게 내가 먼저 우산을 나눠주었고, 우리는 그 일을 계기로 친구가 되었다. 처음엔 그냥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었을 뿐인데, 함께 급식을 먹고 하교를 하고, 시험 기간마다 도서관에서 나란히 앉아 문제집을 풀던 시간들이 쌓이면서 그 마음은 5년 전부터 어느새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계속 친구할 거지?' 소이가 언젠가 물었을 때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언젠가는 친구 이상의 말을 전하겠다는 조용한 다짐을 품고 있었다. 그 다짐은 매년 봄마다, 그 애가 새로운 학년의 교실에서 나를 향해 웃어줄 때마다 조금씩 더 단단해졌는데, 그렇게 단단해질수록 나는 오히려 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도 모르고, 나는 그 언젠가를 5년이나 미뤄왔다. 그런데 그 언젠가가, 방금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어째서 나는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걸까.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나는 그 떨림을 감추려 물병을 꽉 움켜쥔 채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물병 표면에 맺힌 물기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지만, 그마저도 지금 내 안에서 무너지고 있는 감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준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다가오려는 기색을 보였지만, 나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어색하게 일그러졌는지는, 아마 하준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나 알바 시간 늦어서 먼저 간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아네모네 오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 거짓말 아닌 말 속에 얼마나 많은 도망이 섞여 있었는지는, 나만 알고 있었다. 교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5년간 쌓아온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소리가, 정말로 귀에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그건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진짜였을까. 골목을 몇 개나 지나쳐 걷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소이의 웃는 얼굴과 하준의 손길이 번갈아 떠올랐고, 나는 그 장면을 지우려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걷다가 문득 발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맑은 날에, 왜 하필. 절대 티 내지 말자. 소이가 눈치채면 안 돼.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지만, 그 다짐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는데, 티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조각들이 다시 붙는 건 아니었으니까. 카페 아네모네는 학교에서 십 분쯤 떨어진 골목 안쪽에 자리한 조용한 곳이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익숙한 원두 향이 코끝을 스쳤고, 사장님이 앞치마를 건네며 늦은 걸 타박했지만 나는 대충 웃어넘기며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손끝이 자꾸 허공을 헤매는 느낌이었고, 단추를 두 번이나 잘못 채웠다가 다시 풀어야 했다. 손님도 별로 없는 오후, 나는 카운터에 서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하는 걸까.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이었다. 소이를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로 5년을 버텨온 나였는데, 그 사실이 이제는 방향을 잃은 화살처럼 허공에 붕 떠버린 느낌이었다. 그 화살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그저 떨어지고 있다는 감각, 그게 지금 내 마음이었다. 커피 머신이 요란하게 물을 끓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오후였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컵을 정리하고 테이블을 닦아봐도,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그 장면이 재생됐다. 하준의 손이 소이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그 순간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늘어져 반복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소이가 그럴 리가. 그렇게 부정해보아도 방금 본 것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나는 애꿎은 컵을 몇 번이나 헹구고 또 헹구며 시간을 흘려보냈고, 시계는 그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초침 소리를 또박또박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카페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딸랑, 하는 종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는데, 낯이 익었다. 학생회 부회장, 서지안. 전교 1등에 완벽한 미모로 유명한, 나와는 접점이 거의 없던 그 애가 어쩐 일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서 있었다. 평소라면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넘겨져 있을 머리카락도 어딘가 헝클어져 있었고, 교복 재킷의 첫 단추가 풀려 있는 것마저 지안답지 않았다. "저기…" 지안이 입을 열었다가 말을 멈췄다.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눈가는 붉게 부풀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저 애도 나처럼 뭔가를 잃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카운터 너머로 손을 뻗어 물 한 잔을 따르며, 뭐라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유리컵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가 이 순간만큼은 지나치게 크게 들렸고, 나는 그 컵을 내밀면서도 지안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안은 그런 나를 향해 걸어오다가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는데, 그 표정이 마치 방금 세상이 무너진 사람의 얼굴 같았다. 입술은 몇 번이나 달라붙었다가 떨어졌지만, 끝내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얼굴에서 낯선 동질감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내가 짓고 있던 표정과, 지금 지안이 짓고 있는 표정이 어딘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 둘 다 뭔가를 완전히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게 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지안의 손끝이 컵을 향해 뻗어오다가 다시 허공에서 멈춰 섰고, 그 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심장 어딘가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저 애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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