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지안은 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잔 표면에 서린 물기가 그 애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어 반짝거렸고, 나는 카운터 안쪽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손님도 없는 한적한 시간이니 괜찮다는 뜻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서, 나는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들어 조용히 자세를 고쳤다.
"괜찮으세요?" 물었지만 사실 그 질문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 얼굴이었으니까. 눈가는 붉었고, 입술은 몇 번이나 달싹이다 다시 다물어졌으며, 어깨는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네, 그냥." 지안이 애써 대답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완벽주의자라는 평판답게 그 순간에도 무너진 표를 내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 떨림은 아주 작아서,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나는 굳이 캐묻지 않고 물 잔을 하나 더 채워 그 애 앞에 놓아주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지안은 잔을 바라보다가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저 고개를 살짝 숙였는데, 그 작은 몸짓에서도 애써 버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한참을 그렇게 침묵이 흐른 뒤, 지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학생회장님한테… 고백했어요." 말끝이 갈라졌다. "3년 동안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목소리가 거기서 끊겼고, 나는 그 다음 말이 무엇일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3년이라는 숫자가 유난히 무겁게 다가왔다. 나의 5년과 겹쳐지면서.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었대요. 중학교 때부터." 지안이 끝내 그 말을 뱉어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지만 애써 참는 게 보였고, 나는 그 모습에서 낯설지 않은 아픔을 느꼈다. 나 역시 오늘, 5년을 품어온 마음이 소이의 웃음 한 번에 무너지는 걸 목격했으니까.
그 웃음. 소이가 다른 남자와 손을 잡고 걸어가며 지었던 그 환한 웃음이 자꾸 눈앞에 떠올라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저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지안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동질감이 섞여 있었다. "오늘요?"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그냥 어깨를 살짝 들어 올렸다. 구태여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 않았고, 지안도 더 캐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 애도 자신의 아픔을 굳이 설명받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내 마음을 이해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각자의 물 잔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카페 안은 원두 향과 침묵으로 가득 찼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그런 시간이었다. 어디선가 원두 볶는 냄새가 은근하게 퍼졌고, 그 냄새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혀 주었다.
"근데 왜… 여기로 왔어요?" 내가 뒤늦게 물었다. 아네모네는 그리 유명한 카페도 아니었고, 지안과 나 사이에 특별한 인연도 없었으니 당연한 질문이었다. 학교에서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인 사이였고,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었다.
"그냥…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울고 싶었어요." 지안이 짧게 대답했다. 그 말이 얼마나 외로운 말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완벽한 겉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에게, 무너진 모습을 보여도 되는 곳이 얼마나 드문지도. 학생회 부회장이라는 자리는, 아마 넘어져도 넘어진 채로 있을 수 없는 자리일 테니까.
"여기 알바생이 저인 줄은 몰랐겠네요." 나는 어색함을 깨려 가볍게 던졌지만, 지안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완벽하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그 웃음에는 힘없는 그늘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웃음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강도윤, 맞죠?" 지안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조금 놀랐다. 학생회 부회장이 나 같은 평범한 학생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네, 맞아요." "우리 반 친구가 그러던데, 강도윤은 남 이야기 잘 들어준다고." 지안이 눈을 내리깔며 덧붙였다. "그래서 왔나 봐요, 여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의 이야기는 잘 들어주면서, 내 이야기는 5년째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나 자신이 문득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착한 남자, 라는 말이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겁쟁이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스쳤다.
나는 그 생각을 애써 밀어내며 원두통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나마 정신을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강도윤 씨도, 오늘 뭔가 있었죠?" 지안이 다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커피 머신 쪽으로 몸을 돌려 새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그라인더가 돌아가며 내는 소리가 침묵을 대신 메워주는 게 고마웠다. 대답을 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5년 동안 좋아했어.' 속으로만 되뇌었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소이에게도, 지안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한 번도 제대로 꺼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나중에 말할게요." 나는 그렇게만 대답했고, 지안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 애는 남은 물을 한 번에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를 정리하는 손짓이 조금 전보다 훨씬 차분해 보여서, 나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조용히 있게 해줘서." 지안이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저녁 햇살이 그 애의 옆얼굴에 비스듬히 걸쳐 있었고, 붉게 부은 눈가가 그 빛 속에서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내일도 여기 있어요?"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나온 대답이었는데, 지안은 그 짧은 대답에 안도하는 듯 옅게 웃으며 문을 밀고 나갔고, 딸랑, 하는 종소리가 그 애의 뒷모습을 따라 울렸다.
혼자 남은 카페 안, 나는 그 애가 앉았던 자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물 잔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반쯤 비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비어 있었다. 나는 그 잔들을 치우려 손을 뻗다가 문득 멈췄다.
오늘 하루, 나는 소이의 웃음에 무너졌고, 지안은 학생회장의 거절에 무너졌다. 서로 다른 이유로 무너진 두 사람이 우연히 같은 카페에서 마주쳤다는 게, 단순한 우연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의 이 우연한 만남이 그저 하루짜리 일회성 위로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예감이었다.
창밖으로 완전히 넘어간 해가 어둠을 데려오고 있었다. 나는 잔을 마저 정리하며, 내일도 지안이 정말로 이 문을 열고 들어올지, 그리고 그때는 내가 오늘 하지 못한 말을 꺼낼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