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약초숲의 백초약사

5화

진동은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더 잦아졌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울림이 규칙적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걸음처럼 이어졌다. 땅. 땅. 땅. 일정한 간격이었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걸어오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발소리가 아니라 울림만 있었다. 강무열이 등의 망태기를 벗어 던졌다. "마을까지 뛰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오."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평소 침착하던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서은아가 낫을 고쳐 쥐며 주위를 살폈다. "경계석 안쪽에 예전에 쓰던 움막이 있어요. 여기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뛰면 오 분. 걸으면 십오 분." 이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정보를 물을 시간이 아니었다. 발밑의 진동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은 울림이었다. 셋은 뛰기 시작했다. 숲은 어두웠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 빛마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발밑의 흙이 축축했고, 낙엽이 미끄러웠다. 다리에 힘이 빠지려 할 때마다 이도현은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백초약사 - 체력 소모 경고] 무시하고 계속 뛰었다. 숲의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쳤다. 뺨에 가느다란 상처가 생겼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발밑의 뿌리에 걸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귓속에서 뛰는 것 같았다. 서은아가 앞서 달리며 방향을 가늠했다. 낫을 쥔 손이 나뭇가지를 헤치고, 발끝은 흙바닥의 굴곡을 정확히 짚어 나갔다. 오랜 세월 이 숲을 다닌 사람의 걸음이었다. 강무열은 뒤에서 숨을 몰아쉬며 따라왔다. 몸집이 크고 무거운 만큼 속도가 조금씩 처졌다. "조금만, 더." 서은아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움막이 보였다. 낡은 나무 판자로 지어진, 사람 두세 명이 겨우 들어갈 크기의 오두막이었다. 지붕은 반쯤 내려앉아 있었고, 벽 곳곳에 이끼가 붙어 있었다. 오래 방치된 흔적이 역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서은아가 문을 닫고 나무 빗장을 걸었다.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숨소리만 세 사람의 것이 오두막 안을 채웠다. 거칠고, 빠르고, 끊어질 듯 이어졌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유일한 빛이었다. 그 빛마저 창백해서, 세 사람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각자의 숨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이도현이었다. "이 근처에서 안전구역이 무너진 게 몇 번째요?" 낮게 물었다. 강무열이 벽에 기대며 대답했다. "올해 처음이오. 원래는 몇 년에 한 번 있는 일인데." "그럼 이번 건은 이례적이란 뜻이군요." "이례적인 정도가 아니오. 이 마을이 생긴 이래로 이런 진동은 처음 겪는 거요." 강무열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경계석이 세워진 지 오십 년이 넘었소. 그동안 무너진 적은 손에 꼽힐 정도였는데." "자령단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서은아가 이도현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도요. 최근 들어 이 근방 마수들 움직임이 확실히 이상해졌어요. 뭔가에 끌리듯 몰려다니는 것 같은." "몰려다닌다는 게 정확히 어떤 겁니까." "원래 마수들은 영역 다툼이 심해요. 서로 마주치면 싸우거나 피하거나. 그런데 요 며칠은 달랐어요. 무리를 지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걸 두 번이나 봤어요." "어느 방향으로." 서은아가 잠시 침묵했다. "이쪽이요. 안전구역 쪽으로."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창밖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짐승의 것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뒤틀린 느낌이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긁혀 나오는 듯한, 짐승 특유의 낮은 울림에 쇳소리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이도현은 숨을 죽였다. 울음소리가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늘어났다. 창틈으로 밖을 살폈다. 달빛 아래, 나무 사이로 붉은 눈이 보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쌍이었다. 눈동자들이 나무 사이를 오가며 흔들렸다. 마치 움막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몇 마리요?" 강무열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셋... 아니, 다섯은 넘습니다." 서은아의 손이 낫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손등에 힘줄이 섰다. "이 움막은 오래 버틸 곳이 아니에요." 강무열이 벽을 손으로 짚었다. "판자가 얇소. 발톱 몇 번이면 뚫릴 거요." "무기는요." 이도현이 물었다. 강무열이 허리춤에서 짧은 단검을 꺼내 보였다. "이거 하나뿐이오. 원래 채집을 나올 때는 무기를 크게 챙기지 않으니." 서은아는 낫을 들어 보였다. "저는 이거고요. 마수를 상대할 만한 물건은 아니에요." 이도현은 시스템 창을 다시 열었다. [백초약사 - 전투 관련 스킬 없음] [직업 포인트 3 보유]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채집 스킬만 갖춘 채로 마수 무리와 마주하게 될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이라곤 약초를 구분하고, 즙을 짜내고, 효능을 감별하는 것뿐이었다. 싸움과는 거리가 먼 능력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물러설 수는 없었다. "움막 안에 숨는 건 오히려 위험합니다. 갇힌 채로 당하는 것보다는." 이도현이 낮게 말했다. 강무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뭘 하란 말이오. 밖으로 나가서 싸우자는 거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저한테 지혈초와 적근초가 있습니다. 즙을 짜서 뿌리면 냄새로 방향을 흐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서은아의 눈이 커졌다. "그게 될 것 같아요?" "확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강무열이 미간을 좁혔다. "약초로 마수를 막는다고? 들어본 적 없는 방법이오." "들어본 적이 없다고 안 될 이유도 없죠." 이도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이도현은 망태기를 뒤져 지혈초를 꺼냈다. 손끝으로 짓이기며 감별의 눈을 다시 활성화했다. [지혈초 - 즙 추출 가능. 강한 향 발생] 예상대로였다. 짓이긴 즙에서 시큼하고 강한 향이 뿜어져 나왔다.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였다. 마수의 후각을 어지럽힐 만한 냄새였다. 서은아가 코를 막으며 물러섰다. "이거, 사람도 못 견딜 냄새인데요." "그러니까 마수도 못 견딜 겁니다." 이도현은 남은 적근초까지 꺼내 함께 짓이겼다. 두 즙이 섞이며 냄새가 더 독해졌다. 눈이 시큰거릴 정도였다. 울음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이도현은 문틈으로 즙을 뿌리며 움막 주변에 원을 그렸다. 손바닥에 남은 즙이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밖에서 낮은 신음 같은 소리가 났다. 냄새에 반응하는 것처럼 발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강무열이 창틈으로 밖을 살피며 낮게 말했다. "멈췄소.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완전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 마리가 움막 벽을 향해 몸을 부딪치듯 다가왔다. 나무판이 우직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쪽으로 온다!" 강무열이 소리쳤다. 서은아가 낫을 들고 문 앞을 막았다. 발을 넓게 벌리고 자세를 낮췄다. 손에 쥔 낫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도현은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겁이 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릎이 조금 꺾이고 있었다. 창틈으로 보이는 붉은 눈이 정확히 이쪽을 향해 있었다. 그 눈빛 너머로, 뭔가 더 큰 것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확신이 들었다. 저 마수들 뒤에 뭔가가 있었다. 무언가가 마수들을 이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벽이 다시 흔들렸다. 판자 하나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서은아가 소리쳤다. 강무열이 단검을 고쳐 쥐며 벽 쪽으로 다가섰다. "저놈들이 뚫고 들어오면 좁은 공간에서 셋이 부딪히게 될 거요. 그럼 승산이 없소." "알고 있습니다." 이도현이 대답했다.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는 티가 났다. 이도현은 남은 지혈초를 모두 꺼내 짓이겼다. 손바닥이 즙으로 붉게 물들었다. 손끝이 시큰거렸다. 짓이긴 즙에서 나는 냄새가 좁은 움막 안을 가득 채웠다. 벽이 또 한 번 흔들렸다. 이번엔 더 큰 소리였다. 판자 틈으로 뭔가 검은 형체가 언뜻 스쳤다. "길게는 못 버텨요!" 서은아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이도현의 손끝에서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백초약사 - 감각 확장 가능] 처음 보는 알림이었다. 지금까지 없던 옵션이었다.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벽이 곧 무너질 것 같았다. 나무판이 또 한 번 갈라졌다. 틈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이도현은 그 옵션을 눌렀다. 순간, 시야가 넓어지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빛과 소리와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 같았다. 벽 너머의 마수들, 그 발톱, 숨소리, 그리고 그 뒤에 도사린 무언가의 기척까지. 모든 것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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