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약초숲의 백초약사

2화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도현은 그 피를 내려다보았다. 통증보다 먼저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눈앞에 뜬 글자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상처 감지: 자상, 출혈 중] [백초약사 - 각성 조건 충족] 이도현은 숨을 멈췄다. 게임 속에서 수천 번 본 창이었다. 백초약사. 그가 3년 동안 파고든 부직업. 새벽까지 도감을 넘기고, 조합식을 손끝으로 외웠던 그 이름이었다. 밥벌이도 못 되는 부캐릭터라고 사람들이 비웃던 그 직업이, 여기, 이 낯선 몸 앞에서 다시 떠 있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여기는 게임이 아니었다. 손에 쥔 낫도, 발밑의 흙도, 코끝을 스치는 바람도 모두 현실의 질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시스템 창은 눈앞에 여전히 떠 있었다. 마치 현실과 게임 사이 어딘가에 자신이 끼어버린 것 같았다. "이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이 넘어갔다. [백초약사 각성 완료] [초기 스킬 - 감별의 눈 / 즉석 지혈 습득] [직업 포인트: 0] [경고: 직업 포인트 부족으로 상위 스킬이 잠겨 있습니다] 천 노인이 다가왔다. 늙은 몸이 서둘러 달려오느라 숨이 가빠 있었다. "도련님, 손이!" "괜찮아." 이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몸이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몸이 아니라 머릿속 어딘가에서 지식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배운 적 없는 지식이,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끝을 타고 나왔다. 창밖 화단에 자란 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작고 세 갈래로 갈라진 잎. 줄기에 붙은 잔털. 게임 속에서라면 클릭 한 번으로 스쳐 지나갔을 잡초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잎맥 하나하나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였다. [감별의 눈 - 대상 확인] 지혈초(止血草). 즙을 짓이겨 상처에 바르면 지혈 효과 보통. 손이 저절로 뻗어 나갔다. 이도현은 자신의 손이 창가 화단으로 향하는 걸 지켜보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조종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건 그의 손이었다. 그의 지식이었다. 3년 동안 화면 속에서 외웠던 지식이, 이제야 진짜 손끝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잎을 뜯어 손바닥 위에서 짓이겼다. 손끝에서 풀의 진액이 배어 나왔다. 비릿하면서도 시큼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즙이 피와 섞였다. 상처 위에 짓이긴 풀을 올리고 천으로 눌렀다. 숨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천 노인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가에 주름이 깊게 잡히며, 뭔가 믿기 힘든 걸 본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그런 걸 언제 배우셨습니까." 이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배웠다고 해야 할지, 원래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도현이라는 이름과 하람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조차 헷갈렸다. 그 대신 다시 눈앞의 창을 보았다. [직업 포인트 획득 방법: 채집, 조제, 실전 사용을 통해 누적] [경고: 현재 직업 포인트로는 2차 스킬 트리 진입 불가] 숫자는 0이었다. 게임 속에서라면 레벨 60을 찍고 온갖 희귀 재료를 다 모았을 캐릭터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시 0부터였다.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0에서 시작하는 삶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마당까지 들어와 멈췄다.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남궁 도련님 계십니까!" 걸걸한 목소리였다. 천 노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 상단주입니다." 목소리에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이도현은 그 두려움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람의 기억 속에서 이 이름이 나올 때마다 저택 안 분위기가 얼어붙었었다. 이도현은 손을 짚고 일어섰다. 다리가 떨렸지만 버텼다.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지만, 이 악물고 버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창밖으로 배가 나온 중년 사내가 시종 두 명을 데리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게 보였다. "나가서 만나야겠어." "몸이 그런데..." "어차피 피할 방법도 없잖아." 이도현은 문을 열고 마루로 나섰다. 바깥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아직 낫지 않은 손바닥이 시큰거렸지만, 표정에는 드러내지 않았다. 우 상단주가 그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오, 도련님. 안색이 안 좋으시군요." 입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그 눈빛은 마당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대문의 삐걱거림, 회랑 기둥의 갈라진 틈, 마당 흙바닥의 잡초까지, 모든 걸 값으로 환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가문의 빚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도현은 짧게 대답했다. 하람의 기억 속에 남은 이 사내의 인상이 떠올랐다. 교활하고, 이 저택을 진작부터 원하던 자였다. 몇 번이나 헐값에 저택을 사겠다며 사람을 보냈던 자였다. "저택을 넘기시면 남은 빚은 없는 걸로 하겠습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 안에는 이미 답을 정해둔 확신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지." "그건 도련님이 알아서..." "싫습니다." 이도현은 딱 잘라 말했다. 우 상단주의 표정이 굳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마당의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싫다고요?" "이 저택은 넘길 수 없습니다." 하람의 기억 속에서, 이 저택은 유일하게 남은 흔적이었다. 여동생이 뛰놀던 마당. 어머니가 걸었던 회랑. 그 모든 게 여기 있었다. 하람의 기억이지만, 이제는 이도현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낯선 몸에 스며든 낯선 그리움이 가슴 한켠을 무겁게 눌렀다. 우 상단주가 웃음을 거뒀다. "그럼 셈은 다르게 해야겠군요." 목소리가 낮아지고, 눈빛이 차가워졌다. 시종 두 명이 상단주의 뒤에서 팔짱을 끼며 위압적으로 섰다. "닷새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다른 답을 가져오지 않으면, 법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마당을 떠났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마당에는 정적만 남았다. 천 노인이 다가와 낮게 물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도련님, 정말 방법이 있으십니까." 이도현은 손바닥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지혈초 즙이 마르며 피가 멎어 있었다.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더는 흐르지 않았다. "있어."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물러설 곳도 없었다. 게임 속에서라면 리셋 버튼을 누르면 그만이었다. 여기서는 아니었다. 여기서는 실패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돈이 필요해. 그리고 그 돈은... 밖에서 벌어와야 해." 천 노인의 눈이 커졌다. "밖이라 하시면." "숲." 이도현은 창밖으로 보이는 먼 산줄기를 가리켰다. 하람의 기억 속에서 그 산자락은 회령숲이라 불렸다. 오래전부터 약초꾼들이 드나들던 곳. 그리고 위험한 마수들이 산다는 곳. 천 노인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도련님, 그곳은 함부로 갈 곳이 아닙니다. 마을 약초꾼들도 경계 안쪽에서만 겨우 캐 갈 뿐입니다." "약초를 캐서 팔면 돈이 될 거야." "도련님 몸으로는..." "할 수 있어." 이도현은 다시 손을 펼쳤다.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눈앞에 다시 글자가 떠올랐다. [백초약사 - 채집 경험치 +1] 숫자가 늘고 있었다. 아주 작지만, 분명 늘고 있었다. 이 조그마한 숫자 하나가, 지금 이도현이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닷새. 닷새 안에 뭔가를 이뤄야 했다. * 그날 오후, 이도현은 낡은 배낭을 메고 저택을 나섰다. 천 노인이 챙겨준 마른 빵과 물통, 그리고 하람의 옷 중 가장 튼튼한 것이 짐 안에 들어 있었다. 배낭 끈이 어깨를 눌러왔다. 익숙하지 않은 몸이라 그 무게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도련님." 천 노인이 대문 앞까지 따라 나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이도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숲까지는 걸어서 반나절이었다. 몸이 약해서 그보다 더 걸릴 것 같았다.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이도현은 계속 눈앞의 창을 확인했다. [직업 포인트: 3] 지혈초를 뜯을 때마다, 감별의 눈으로 풀을 확인할 때마다 아주 조금씩 숫자가 움직였다. 길가에 자란 잡초 하나에도 눈이 갔다. 감별의 눈이 자동으로 켜지며 정보를 띄웠다. 대부분은 쓸모없는 잡초였다. 하지만 간간이 약재로 쓸 수 있는 풀들이 섞여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뜯어 배낭에 담았다. 느렸다. 하지만 확실했다. 해가 기울 무렵, 회령숲 어귀에 도착했다. 노을이 나무 끝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숲 입구에는 낡은 돌기둥이 서 있었다. 표면에 희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경계석. 하람의 기억에서 그 이름이 떠올랐다. 안전구역과 위험구역을 나누는 표식이라고 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 문양은 절반쯘 지워져 있었지만, 그 형태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돌기둥 안쪽은 사람 손이 닿은 흔적이 있는 얕은 숲이었다. 발자국이 남은 흙길, 누군가 베어낸 나뭇가지,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 너머는 깊고 어두웠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이도현은 경계석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아직 몸에 익지 않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냄새를 맡았다. 젖은 흙 냄새. 이끼 냄새. 나무껍질 냄새. 여기까지는 익숙한 숲의 냄새였다. 게임 속에서도 숱하게 맡아본, 편안한 배경음 같은 냄새였다. 그런데 그 사이로 무언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비릿하면서도 서늘한, 설명할 수 없는 냄새. 이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숲 안쪽, 나무들 사이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사람보다 크고, 짐승보다 조용한 무언가였다. 나뭇잎 사이로 그림자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마치 숲 자체가 숨을 죽이고 그 움직임을 감추는 듯했다. 이도현은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어두워지는 숲 안쪽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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