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회령숲의 경계석을 넘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습기가 짙어졌다. 나뭇잎 냄새 사이로 흙냄새가 더 무겁게 섞여 들었다. 이도현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손끝은 아직도 조금 차가웠다.
경계석은 무릎 높이의 낡은 돌기둥이었다. 표면에는 오래전에 새겨진 듯한 홈이 파여 있었는데, 이제는 이끼가 절반쯤 덮어 원래 무늬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마을 사람들은 이 돌을 넘는 순간부터 진짜 숲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지금에서야 몸으로 이해가 갔다.
앞서 보았던 그림자는 사라진 뒤였다. 나뭇잎도 흔들리지 않았다. 새소리도 다시 들려왔다.
착각이었을까.
아니다. 손끝의 냉기는 착각이 만드는 게 아니었다. 게임에서든 현실에서든, 몸이 먼저 아는 위험은 항상 진짜였다. 수천 시간을 몬스터와 함정 사이에서 굴러본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화면 밖으로 나온 지금도 그 감각은 죽지 않았다.
이도현은 걸음을 늦추며 주변을 살폈다. 발밑의 흙은 부드러웠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고, 웅덩이 표면에는 나뭇잎 그림자가 잘게 흔들렸다. 시스템 창을 열자 익숙한 파란 반투명 화면이 시야 한쪽에 떠올랐다.
[감별의 눈 - 활성화 가능]
손끝에 힘을 모았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게임 속에서 수도 없이 눌러본 스킬 버튼을, 지금은 손끝의 의지만으로 눌러야 했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이제는 제법 손에 붙었다.
눈앞의 풍경이 미세하게 겹쳐 보이며 색이 갈라졌다. 나무 밑동, 바위틈, 축축한 이끼 아래. 몇몇 지점이 옅은 초록빛으로 빛났다.
약초였다.
그는 허리를 굽혀 첫 번째 빛을 따라갔다. 뿌리가 붉은 풀이었다. 잎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고, 줍자마자 손끝에 알 전지 지식이 스며들 듯 흘러들었다.
[적근초 - 지혈, 해열 효과. 채집 등급 하]
게임에서 백 번은 캐 봤던 풀이었다. 화면 속에서는 그저 클릭 한 번으로 끝나는 채집이었다. 현실에서 손끝에 닿는 감촉은 훨씬 생생했다. 뿌리를 뽑을 때 흙이 딸려 나오며 손톱 밑에 파고드는 감각. 잎에서 풍기는 알싸한 냄새. 이 모든 것이 화면 밖에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흙이 묻은 뿌리를 조심스레 뜯어 망태기에 담았다.
다음 빛은 조금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이도현은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이 숲은 넓었다. 경계석에서 눈에 보이는 곳까지만 안전구역이라고 했다. 그 안쪽에서만 채집해도 하루 벌이는 충분히 나올 것 같았다. 무리해서 더 깊이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이 몸은, 남궁하람의 몸은 아직 그럴 만한 체력이 아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약초는 어렵지 않게 찾았다. 감별의 눈이 짚어주는 빛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네 번째는 바위틈 깊숙이 박혀 있어 손을 다 넣어야 했다. 손등이 바위에 긁혔지만 크게 아프지 않았다.
다섯 번째 약초를 캐던 중, 등 뒤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몸을 굳혔다.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숲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새소리가 멈춰 있었다.
이도현은 망태기를 고쳐 메고 천천히 나무 사이를 살폈다. 짐승보다 조용하고 사람보다 큰 무언가. 경계석 앞에서 본 그 그림자가 다시 떠올랐다. 검은 형체, 사람의 윤곽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흐릿함.
숨을 죽이고 오 초를 기다렸다. 십 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감별의 눈을 다시 펼쳤다. 혹시 위험한 존재의 흔적이라도 잡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는 여전히 약초를 나타내는 옅은 초록빛뿐이었다. 위협이 될 만한 반응은 없었다.
"착각이겠지."
혼잣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안전구역 안쪽으로 더 붙였다. 경계석에서 완전히 멀어지지 않도록. 언제든 몸을 돌려 뛸 수 있는 거리를 유지했다.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 비쳐 드는 빛이 아까보다 붉은 기를 띠기 시작했다.
약초 채집을 이어가는 동안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감별의 눈이 짚어주는 자리를 향해 몸이 먼저 반응했다. 게임 속에서 수천 시간을 쏟았던 손놀림이 이 병약한 몸에서도 살아났다. 뿌리를 뽑을 때 힘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잎을 다치지 않게 하려면 어느 각도로 잡아야 하는지. 몸은 이 모든 걸 처음 겪는데도 손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손목은 여전히 가늘었고 숨은 조금만 걸어도 가빠졌다. 허벅지도 가늘어서 오래 쪼그려 앉으면 저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그런데 손끝의 감각만큼은 또렷했다. 마치 이 몸에 두 개의 기억이 겹쳐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병약하고 서툰 몸의 기억, 다른 하나는 수천 시간의 게임 플레이가 남긴 손끝의 기억.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약초를 캐는 동안 다리에 힘이 점점 빠졌다. 이도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무 밑동에 손을 짚었다. 숨을 고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하늘이 조금씩 색을 바꾸고 있었다.
망태기가 절반쯤 찼을 때, 이도현은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었다. 등을 나무둥치에 기대자 서늘한 감촉이 옷 위로 전해졌다.
품 안에서 무언가가 만져졌다.
천 노인이 챙겨준 작은 주머니였다. 나올 때 실없이 쥐여준 것이라 생각해 지금까지 열어보지 않았다. 열어보니 낡은 청동빛 고리가 들어 있었다. 팔찌라기보다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작은 고리였는데, 표면에 희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점. 선. 물결. 탑.
이도현은 눈을 좁혔다. 낯익은 느낌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이건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다. 남궁하람의 것이었다. 몸의 주인이 남긴,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흔적.
고리를 손에 쥐는 순간, 머릿속이 흔들렸다.
작은 손. 자신의 손보다 작은, 여자아이의 손이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땋은 머리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마당인지 뜰인지 모를 곳에 햇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놓인 평상, 그 위에 흩어진 몇 개의 장신구.
오빠, 이거 나 줄 거야?
목소리는 또렷하지 않았다.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했다. 하지만 감정은 선명했다. 애틋함. 그리고 그 뒤에 숨은 불안. 마치 이 순간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장면은 거기서 끊어졌다. 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흩어지는 기억이었다.
이도현은 눈을 떴다. 손바닥에 고리의 테두리 모양이 붉게 남아 있었다. 심장이 아직도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건 분명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것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이게 그 여동생 물건인가."
혼잣말이었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궁하람의 감정이었다. 이제는 이도현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이 몸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이미 남궁하람의 삶 일부를 짊어지고 있었다.
고리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무릎이 살짝 흔들렸다. 오래 앉아 있던 탓인지, 아니면 방금 본 기억의 여파인지 알 수 없었다.
해가 서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있었다. 숲의 색이 짙은 주황으로 물들었다. 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발밑까지 닿았다.
오늘은 여기까지가 적당했다. 이도현은 망태기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채집한 약초를 팔면 얼마가 될지 셈해보았다. 지혈초 몇 뿌리, 적근초 여덟 뿌리, 이름을 모르는 옅은 청록빛 이끼 하나.
이끼는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감별의 눈이 다른 약초들처럼 초록빛으로 짚어주지 않았는데, 그 자리를 지나칠 때 이상하게 손끝이 저릿했다. 몸을 굽혀 살펴보니 바위 그늘에 옅은 청록빛으로 빛나는 작은 덩어리가 붙어 있었다. 손으로 떼어내는 순간 다른 약초와는 다른 감촉이 느껴졌다. 축축하면서도 서늘한, 살아 있는 것 같은 감촉.
[미확인 채집물 - 감별 불가]
시스템조차 등급을 매기지 못했다. 게임에서도 이런 표시는 흔치 않았다. 대개는 스토리와 관련된 특수 아이템이거나, 지나치게 희귀해서 등급 체계 밖에 있는 물건일 때 뜨는 문구였다.
"이건 나중에 확인해봐야겠군."
망태기를 다시 고쳐 메고 경계석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워지기 전에 안전구역을 벗어나 마을 쪽으로 나가는 게 나았다. 밤의 숲은 낮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된다는 것을, 그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발걸음을 서두르며 이도현은 오늘 하루를 되짚어 보았다. 경계석 앞에서 본 그림자, 등 뒤에서 들린 나뭇가지 소리, 그리고 방금 본 짧은 기억까지. 모든 것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다. 이 조각들이 언젠가 하나로 이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좋은 예감은 아니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이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멀리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숲속에서, 두 사람쯤 되는 목소리였다. 남자와 여자의 것이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다투는 것 같은 억양이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가 다시 낮아졌다. 남자의 목소리는 그보다 낮고 무거웠는데, 화가 났다기보다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톤이었다.
이도현은 그 자리에 선 채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안전구역의 경계가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다시 가늠해 보았다. 목소리가 나는 곳은 그가 서 있는 위치보다 조금 더 깊은 숲속인 듯했다.
돌아갈 것인가, 살펴볼 것인가.
망설이는 사이에도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